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도련 Jul 18. 2020

02 주신 단어로 글을 적습니다

#소금

 

나는 답이 떨어지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만약 그대가 이과 출신이라면 반가움과 미안함도 같이 듭니다. 그대의 빛나는 분석력과 철두철미한 풀이는 내게 통하지 않아요. 아마 내로라하는 대학교수들이 나를 둘러싸고 증명해도 실패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딱 정해진 공식이 없으니까요.

함께 거주 중인 <국립대 (구)장학생> 마저도 오랜 심층연구 끝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물리학도였습니다.

한 때 '이과 나온 여자'로 불렸던 물리학도는 손으로 10N을 가르킵니다. 나를 세게 밀고 몇 뉴턴이야? 끝없이 물었죠. 에너지 개념을 이해시키기까지 말입니다. 몰라서 입을 다물면 10N은 어느새 300N이 되어있습니다. 힘의 크기는 모르겠으나, N 앞에 어떤 숫자가 붙든 아프다는건 알았습니다.

팔뚝에 멍이 들고 정답란에 눈물이 톡톡 박힙니다. 위대한 뉴턴 아저씨를 속으로 욕했습니다.

'다시는 사과나무 아래에 앉지 마세요.' 하고.

이렇 듯 나는 숫자와 친하지 않습니다. 친해질 뻔 하는 찰나에 항상 훼방꾼을 만나요.

나에게 소금은 훼방꾼입니다. 우리집 물리학도는 같은 단지 친구보다도 내가 수학과 친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5년이 다 되어가도록 절교 상태면 우린 좀, 안맞나봅니다.

수학문제는 그렇게 까다롭고 별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멀쩡한 달력을 물에 찢어야만, 고장난 시계를 며칠 두어야만, 굳이 고층으로 가 공을 튀겨야만 합니다. 그리고 '소금을' 녹였다가 마르길 기다려야만 하죠.

맞아요, 소금물 농도문제를 만날 때마다 내 두뇌는 안에서든 밖에서든 불이 났습니다. 안에서는 쟁쟁한 토론을 합니다. '소금이 줄었다!' 혹은 '양은 그대로, 기억해내라!' 어느 말이 참인지 저들끼리 싸웁니다. 밖은요? 자칫 오답이나 침묵으로 끌었다간 물리학도의 무시무시한 주먹이 기다립니다.

답을 구하기 전에 소금 대신 내가 모두 녹아버릴 것 같았어요. 나는 소금의 양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도요. 4%, 200g이었던 것을 다시 300g 물을 넣고 증발시키고. 그런데 또 소금을 몇 g 넣다니요, 짠 물은 짠 물일 뿐인데 말입니다.

연필 잡은 손이 허공을 돌자 물리학도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도대체 너란 애 머릿 속에 한번 들어가보고 싶다!"

불가능해서 다행이었죠. 양에 대한 관심은 온데 간데 없고 그 순간 생각했습니다. 돌리는 대로 소금이 나오는 '마법의 맷돌' 을요. 바다 깊숙이 빠진 맷돌이 쭉 돌고 있어서 바닷물이 짜다는. 그렇다면 그건 계산을 어떻게 해야하나. 그저 소금으로 시작해 잡다한 연상을 하는데 주먹이 날아옵니다.

그 때 흘린 눈물이 입에 닿아 훨씬 짰어요. 그런데도 나는 내가 우등생이라고 우깁니다. 다른 정답은 기어코 써낼줄 아니까요. 찢긴 부분에 어떤 숫자가 있었는지 찾아낼 시간에 새 달력을, 멈춘 시계에 건전지를, 탱탱볼은 눈 높이로만 튀겼다면 나도 100점입니다. 소금물은? 그냥 전부 마셔버릴래요!

이따금씩 짠맛나는 훼방꾼을 다시 마주치곤 합니다. 기업 인적성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더라구요. 나부터 소금까지, 소금에서 수학까지. 가까워지기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기다려봅니다. 짠한 기억을 다 잊기 전에요.

작가의 이전글 01 주신 단어로 글을 적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