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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두막 Nov 20. 2024

도시 사람의 제주바다 관찰기

글 쓰러 왔다가 발견한 바닷가 생물에 대하여

올여름, 글을 쓰기로 작정하고 제주로 갔다. 


조천읍 신촌리에 있는 제주 구옥을 잡아 며칠간 혼자 지냈다. 숙소는 걸어서 1-2분이면 바닷물을 만질 수 있는 곳에 있어서 글이 써지지 않아 답답할 때는 바다에 갔다. 


육지에 있을 때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글을 쓰지 않았으니 숙소에 나를 가두고 하루 종일 시간을 비워 놓으면 글 한편은 뚝딱 써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찌나 글이 써지지가 않던지. 글이 안 써지는 동안 내가 한 것이라도 기록으로 남겨 보았다.


새벽 5시 40분 기상 → 아침 요가와 차담 → 아침 8시경 바다 보기 → 아침 식사 → 글쓰기 시도 → 11시 빵 맛집 오픈런. 아주 가끔씩만 나온다는 애플망고 케이크, 그리고 빵 몇 개를 사 옴 → 글쓰기 2차 시도 → 설거지 → 당이 딸려 사온 케이크와 빵들을 해치움 → 아주 잠깐 쉬려고 했으나 오후 4시까지 푹 자버림 → 글쓰기 3차 시도


이 3차 시도에서 무려 1시간 36분 동안 한 글자도 못쓰고 종이와 눈씨름을 했다. 펜을 잡았다가, 고쳐 잡았다가, 지쳐 드러누워 천장을 봤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아 나무 책상에 어른거리는 햇살을 보다가 했다. 결국 나는 답답증을 느끼고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마당에는 벤치가 합체되어 있는 긴 바베큐용 테이블이 있었다. 그 벤치에 앉아 볕을 쬐며 글을 몇 줄 쓰는 데 성공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바닷소리에 주의를 빼앗겼다. 


숙소가 바다에서 이렇게 가까운데 머무는 동안 이 기가 막힌 장소적 이점을 활용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아무래도 해가 지기 전에 바다를 실컷 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집 담 너머에서 늘어져라 자는 고양이들도 동의하는 듯 눈을 가늘게 감았다 떴다. 그래서 나는 추리닝 바람 그대로 바다에 갔다. 


볕을 쬐며 졸고 있는 고양이 두 마리


보도를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작은 정자가 하나 나온다. 신촌리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께서 서로 말씀도 나누시지 않고 바다를 보며 꽤 오랜 시간 앉아 계셨다. 어떤 것들을 흘려보내고 그 자리에 대신 바다를 담고 계시는 모양이었다. 정자 아래엔 고양이 한 마리가 바다를 등지고 앉아 쉬고 있었다.


나는 바닷물이 튀어 내 피부에 닿는 거리에서 바다를 보는 게 좋았다. 그러려면 돌담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길에는 그놈들이 있었다.


바로 갯강구다.


갯강구는 물가를 의미하는 갯에 바퀴벌레의 사투리인 강구가 붙은 말로 바다 바퀴벌레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둘이 같은 종은 아니다. 바퀴벌레는 곤충이지만 갯강구는 갑각류다. 굳이 따지자면 생긴 것도 갯강구가 조금 더 귀엽게 생긴 편이다.




이 생명체를 처음 본 건 성산일출봉 근처의 산책 길에서였다. 


그날은 바다 건너 우도가 보이는 숙소에 느지막이 체크인을 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성산일출봉 입구까지만이라도 다녀오려고 부지런히 다리를 놀린 결과, 정상까지는 못 갔지만 꽤 괜찮은 뷰를 감상하고 내려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이미 파르스름한 빛이 깔려 있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식당을 지날 때였는데,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바퀴벌레들’이 문간을 배회하고 있길래 이 가게의 위생은 좋지 않은가 보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들어가 식사를 할 것도 아니었으니 지나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다가 바닷가로 내려가는 산책로를 발견했다.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지고는 있었지만 바다를 좀 더 보다가 가고 싶어서, 두 사람 남짓 나란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인 그 산책로로 진입했다.


성큼성큼 걸어 내려가던 중 문득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닥에서 까만 무언가가 주춤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걸어가면 산책로 양옆의 풀숲으로 스스스 이동하고 내가 멈춰 서면 그들도 멈춰 섰다. 일부러 크게 발을 구르며 걸어보았지만 그들이 자진하여 풀숲에 몸을 숨겨주지는 않았다. 눈치를 보며 주춤 댈 뿐이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바다를 다 보고 올라올 즈음의 길엔 분명 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을 텐데. 이들이 어둠 속에서 홍해처럼 흩어지는 광경을 상상하는 건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나는 바다 보기를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 생명체들은 갯강구였다. 신촌리에서 지내는 동안, 전날 내린 비로 바닷물이 많이 불어났던 하루만 빼고 매일 이들과 마주쳤다. 


그날은 돌담길을 지나가는데 갯강구가 한 마리도 안 보였다. 의아해하며 바닷가에 다다랐을 때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엔 파도가 돌에 부서지며 물방울이 튀는 정도였는데 그날은 물이 밀려와 발목을 적시고 물러났다. 


그렇다! 갯강구들은 수영을 못하는 것이다. 검색해 보니 간단한 수영 정도는 할 수 있지만 깊은 물속에서는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날 갯강구들은 바닷물에 쓸려 가지 않도록 숨을 죽이고 바위틈에 잘 붙어 있어야 했던 거다. 


마음이 놓였다. 발이 젖은 김에 맨발로 돌을 디뎌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슬리퍼를 벗었다. 발바닥에 와닿는 돌은 차갑고 매끈했다. 물이 밀려오고 물러날 때마다 나에게 눌어붙은 것들이 씻기는 것 같았다.


물은 점점 불어났다. 벗은 슬리퍼를 돌담 가까이에 던져 놓았었는데 바닷물이 그쪽 끝까지 들어차는 바람에 슬리퍼가 떠내려 갈 뻔하여 나는 정자 근처로 돌아갔다. 동네 분들께서는 아직 바다 담기를 하고 계셨다. 


그때부터 약 한 시간 동안 한 자리에 서서 바다를 봤다. 해가 지는 시간이 되어갈수록 바닷물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넘실거렸다.


한참을 서서 바라봤던 미영이네 근처의 바닷가


올여름 제주행의 소득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이다. 방 안에서 글을 쓰는 대신에 이런 바다를 실컷 보았으니 후회하지 않는다. 




다른 날, 같은 장소에서 본 것을 하나 더 기록하고 싶다. 


여느 때처럼 바다를 보며 서 있는데 방둑 위로 갯강구 두 마리가 나타났다. 한 마리는 크기가 작았고 다른 한 마리는 몸집이 두 배 정도 컸다. 둘 다 먹이를 찾아 서성이는 듯했는데 작은 갯강구가 속도를 내다가 큰 갯강구의 엉덩이에 닿았다. 그러고는 놀라 펄쩍 뛰었다. 내가 아니라 갯강구가. 자기들끼리 부딪히고 놀라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때부터는 그들이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겁 많은 생물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무서워하므로 상호 간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조천읍 신촌리에서 가장 진하게 제주 생활의 매력을 느꼈다. 제주에서는 바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즉시 훌훌 나갈 수 있었다. 머리도 빗지 않고 꾸질하게 나가서 바다 앞에 서 있는 행위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 그저 자연스러웠다.


글이 도무지 안 써지는 동안 제주구옥의 천장을 올려다보다 정이 들어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혹시 나중에 묵었던 숙소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천장에게 인사부터 할 것이다.


- 오랜만이야. 여름이 지나고 간신히 글 한편을 썼어.


그러면 천장은 무생물 특유의 고요함을 지키며 그저 제자리에 있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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