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보니 진창길로만 걸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진자리도 익숙해지니 내 길이 아니었나 겸손해진다. 경험을 하고 시절을 겪고 고단한 밥벌이를 하고, 손수레도 차지 않는 책을 뒤지고 잡문을 쓰다 문득 깨달은 건 광막한 우주 공간의 티끌만한 존재로서 모든 건 '사랑'으로 접목된다는 거다. 사랑에는 미움과 시기, 질투, 반목, 대립도 들었다. 그러나 반생명, 반인간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니까 아무리 포장하고 꾸며도 사랑은 수사(修辭)로 통할 수 없다. 포수가 겨눈 새의 순수는 결국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일 뿐이다. 부러 꾸민 사랑은 반지성이기도 하다. 사랑은 모든 것들의 생명 활동이다.
나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반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다. 반사랑은 반생명, 반인간이다. 가족이 존경하지 않는 자라면 분명 잘못 살아온 게 맞다. 밖에서 얻은 울화를 집에다 퍼부었고 세상에서 싹 튼 우울감을 다스리지 못하고 나이만 먹었다. 후회막급이었으나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래도 알아챘으니 미욱한 존재로서 그나마 다행이다. 앞으로 남은 행보가 문제다. 요즘은 딸도 내게 농을 건다. 노인네 취급을 당해도 즐겁기만 하다. 자잘한 집안일을 솔선수범하니 즐겁다. 예전엔 잔소리부터 튀어 나왔다. 가족을 위한다면서 좁쌀 근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거였다. 샤오미(小米) 밴드7을 차고부터 좁쌀과 이별했다. 샤오미는 좁쌀이란 뜻이다.
오후에는 청소 아줌마와 숙소 관리인들과 조촐한 회식이 있다. 남해의 석화, 멍게, 해삼 서껀 주문해 숯불에 구워 먹을 거다. 사무실 직원 올라오지 않은 일요일 쓰레기 보관소가 맞춤한 장소다. 이날 마시려고 트렁크에 이홉들이 소주 한 병을 넣고 다녔다. 술을 즐기는 권 씨와 한 꼬뿌씩 나누면 그만이다. 이 씨는 휴무인데 나오기로 했다. 청소 관리인 총 여덟 명인데 양쪽에서 모난 돌 하나씩 빠진다. 어디 가나 유별난 사람은 있다. 하지만 그것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가능하다. 못난 인간은 일터를 자기집 안방으로 생각하고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다. 그런 인간은 죽기까지 꼴도 안 봤음 싶다.
점심 먹으려고 내다보니 눈이 내린다.
아침엔 성긴 비더니 기온이 떨어졌나 큼직한 눈송이가 조용히 내린다. 바닥에 떨어진 눈송이는 땅의 온기를 견디지 못하고 이내 녹아버리지만 장독 위의 눈은 조금씩 쌓여간다.
요즘은 아침 저녁 타이레놀로 버틴다. 증상이 없으니 Covid는 우리집에서 물러간 듯싶다. 엊그제 숙소에서 땀 난다고 반팔로 돌아다녔더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Covid 증상이 아닌가 걱정됐다. 자고 일어나니 괜찮았다. 아내와 딸은 거의 회복했다.
조촐한 회식 후 이 씨가 가래로 눈을 민다. 휴무일이니 들어가 쉬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그런 동료가 고맙다. 눈을 치우던 이 씨가 깨달음에 대해 얘기한다. 삶의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잠시 아득해진다. 무엇에 대한 성찰이고 성찰 후의 실천은 어찌 할 터인가. 앎은 책임을 수반하는 의식의 열린 상태다. 많은 경험을 하고 책을 읽고도 앎을 실천하지 않는 건 반지성이다.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 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 참된 이치를 깨달았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경험은 많았으나 깨달음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 심연의 섭리를 깨치지 못하고 물 위를 미끄러지는 오만과 편견에 찬 소금쟁이처럼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