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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Jan 24. 2023

잡문

杂文(319)


영하 십이 도.

날이 새자마자 주방 소파에서 자던 개가 내 방으로 달려와 깨운다  산책 가자는 거다. 아직 어둑살이 가시지 않을 땐 좀 있다가 나가자고 하면 도로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와 보챈다. 이번엔 일어나야 한다. 밤새 오줌을 참았으니 녀석도 밖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 진도견은 크면 집안에서 배변을 심지어 마당에서도 오줌을 누지 않는다. 하루 두 번 산책은 기본이다. 천변 갈대밭을 달려 도착하니 바람이 세다. 체감온도는 이십도쯤 될 것 같다. 귀마개에 장갑을 끼고 걷는데 개는 땅바닥에 코를 대고 짐승을 흔적을 맡느라 바쁘다. 얼음장의 경계에서 동트기를 기다리던 물오리가 푸다닥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날아 오른다. 얼마 전 개의 출현으로 물에 뛰어들어 달아난 고라니는 이제 갈대숲에 잠자리를 만들지 않는다. 꿩 몇 마리가 집요한 개의 추적에 꽁지 빠져라 달아난다. 개는 날아간 쪽을 향해 질주하지만 이내 포기한다. 하늘을 날 수 없는 자신의 형편을 아는 까닭이다.


개는 잡는 것보다 찾고 쫓는 데에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고양이를 만나도 씩씩대며 쫓아가지만 어떤 날은 왕초 냥이에게 싸대기를 맞고는 근접 대치를 피한다. 여름엔 물가의 개구리나 메뚜기를 쫓거나 들쥐의 구멍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사마귀가 톱날이 달린 앞발을 치켜들면 뒤로 흠칫 물러날 정도로 녀석은 겁도 많고 소심한 성격이다. 차를 타고 달리면 산과 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를 맡느라 코를 벌름대고 멀리 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두는 개를 보면 마치 상념에 잠긴 듯한 표정이 자못 심각하다. 그럴 때는 짐승이란 존재도 사유가 가능한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생각 없이 사는 것만큼 위태로운 삶도 없는데 사람들은 부러 생각을 회피하거나 외면하는 데에 익숙하다. 무관심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부메랑이다. 무지에서 비롯되는 행위도 좋든 나쁘든 결과를 만드는데 도무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생각은 점점 담론이 되어버린 것 같다. E.H. Carr는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자연 과정, 즉 사계절의 순환이나 인간의 일생이라는 측면이 아니라 인간이 의식적으로 관여하고 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때 역사는 시작된다.'라고 했다. '의식적인 관여'는 의식적인 존재로부터 비롯된다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적극적인 무관심은 인간의 역사, 지구의 방향을 어디로 이끄는 것일까. 개도 '지금, 여기'의 자신의 삶을 사는 데 적극성을 발휘한다. 그저 주인이 이끄는 대로 들에 나가고 똥오줌을 누는 게 아니다. 바람의 방향을 살피고 간밤에 다녀간 동물의 체취를 검색한다. 짐승은 과거와 미래를 가늠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주인을 기억하는 인식은 뛰어나다. 기억은 과거의 자료가 집적된 상태인데 그렇다면 개도 과거를 가늠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주로 냄새와 소리로 기억하지만. 어미에게서 독립한 호랑이는 숲에서 어미를 만나면 싸움을 피하고 돌아서 간다.


아침 먹고 나자 아내가 시래기를 삶으라고 한다. 처마 밑에 걸어든 시래기는 통통한 살은 빠지고 미이라처럼 허옇게 육탈된 줄기를 간신히 걸치고 있다. 가으내 틈틈이 해둔 마른 나무에서 소나무를 골랐다. 잔가지로 불쏘시개를 해서 붙이니 금세 타오른다. 소나무는 그을음이 문제다. 다음엔 아카시나 참나무 종류로 땔감을 해야겠다. 검은 연기가 걸솥의 가쟁이를 시커멓게 그슬리며 하늘로 꾸역꾸역 올라간다. 바람 서슬에 공중에서 흩어진 연기가 코를 찌르고 달아난다. 물을 끓이는 동안 얼굴이며 손이 시커멓게 됐다. 물이 끓고 마른 시래기를 솥에 쑤셔 넣었다. 금방 바스라질 것 같은 시래기는 물이 닿자 순한 푸성귀로 변해 잠긴다. 활활 타는 잉걸불에 담배를 들이민다.


클라이브 해밀턴은 「인류세」에서 질문을 던진다.

'근대는 완전한 해방에 대한 전망에 도취되어 있지만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의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자유가 가장 위대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기로 결정하느냐가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지구를 변화시킬 정도의 힘과 재량을 부여한 정치적•경제적 변화 속에서 선택이 생겨났다. 책임을 지든 방관을 하든, 선택과 관련된 힘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힘이다. 내가 말했듯이, 책임을 지고자 하는 편에는 지구의 물리적 한계, 실제 생태계 교란에 의한 피해 증거, 오랫동안 사욕을 추구하는 이들의 논리, 환경보호주의의 정치적 힘, 자연의 아름다움과 완전한 상태에 대한 내밀한 애착, 그리고 보호할 의무가 있는 문화와 종교의 감각에 대한 과학적 통찰력이 모여 있다.


이와 대척점에 있는 무관심의 편에는 이익 추구로 작동하는 경제구조에 내재된 탐욕적인 집단, 공통된 관심을 가진 막대한 정치 권력, 물질적 풍요에 대한 끝없는 요구,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의도된 무지와 무관심, 회피, 부인 같은 인간의 약점들이 동원된다. 우리의 행위성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이토록 엄청난 투쟁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이 존재하지 않을까?'라고.


지구의 역사 사십오억 년에서 인류의 탄생은 고작 이십만 년이다. 순식간에 불어난 인간종은 역사의 고비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나, 인류세의 미래는 그것마저 불확실하다. 의 말을 경구(警句)로 삼을 것인가 아닌가 역시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불가역적이게도 무지한 선택이라면 운명은 자명하다.


해밀턴은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지구를 지키는 책임자로서의 운명을 거부했던 인간은 미래의 어느 순간에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인간 종에 대한 수치심과 후회로 점철된 영겁의 시간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보수와 재건의 과정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간은 무관심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제2의 문명이 인류세에서 견뎌온 비극의 정당성을 입증할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또 다른 제2의 문명은 너무도 요원해 우리 시대와 과연 어떤 관련이 있을지 불확실하다. 우리는 미래의 존재 영역을 상상할 수 없으며, 부활한 인류가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될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러한 만일의 경우를 보장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확실해 보이는 것이 하나 있다. 과거의 문명이 붕괴되고 남은 잿더미에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고자 하는 새로운 인류는 그 잿더미를 보며 이렇게 선언할 것이다.

"never again!" '


손과 얼굴이 꽁꽁 얼었다. 집안에 들어가 뜨거운 물에 검댕을 씻어냈다. 커피를 끓이고 컵을 든 채 마당으로 나간다. 시래기를 건져낼 시간이다. 너무 삶으면 물러터져 죽이 되기 십상이다. 겨울 시래기는 맛도 좋을 뿐더러 엽산(葉酸)이 풍부해 몸에도 좋다. 시래기도 명절도 우리 세대, 다음 세대에도 볼 수 있을까. 연휴도 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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