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모로 답답한 일주일이었다. 어제 한 생각들이 목구멍을 따라 내려가기라도 했는지 아침엔 가슴이 아프고 뻐근했다. 이제는 내인생에서 오는 고통이 신체적인건지 심리적인건지 아무 분간이 안간다.
왜 사람들은 이단에 빠질까. 왜 자기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고 한낱 똑같은 인간이 자신에게 성경을 풀어줘야만 된다고 생각할까. 왜 사람들은 어떤 이는 영생한다고 믿을까. 그들은 모두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자신과 똑같이 밥먹고 똥싸고 잠자는 인간이 자신과 다를 것이라 믿는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왜 그렇게 교만할까. 왜 그렇게 확신에 가득 차 있을까. 왜 자신의 고민이 단번에 모두 해결되었다고 생각할까. 왜 자신이 답을 찾았다고 생각할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강조하면서 왜 그런 더러운 선민의식을 가지게 되었을까. 난 그들의 너무 이른 의심없는 믿음이 무섭고 두렵다. 신이 정말 있다면 에고의 절정에 치달은 이들을 어느 한순간 심판해버린다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너무 많은 부분에서 원조와 가짜가 닮아있다. 그들의 가면과 얼굴은 이제 하나가 되어서 이리와 양은 분간이 되질 않는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가장 아름답게 만드신 걸 가장 더럽게 더럽힌다. 그럴 수 있는 곳이다. 이리들이 무서운 속도로 양들을 다 잡아먹고 있다. 이제는 누가 이런짓을 다 꾸미는건지, 무엇에 대항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대 사람들은 모두 사랑없음이라는 지독한 병을 안고있기에 내 안에 깊은 상처와 우울을 해결해야하기에, 그 병을 미끼로 너무 많은 종교와 우상이 만들어진다. 부모로부터 받은 깊이 패인 상처, 풀리지 않는 진로고민, 돈과 밥의 문제와 허무와 공허 등이 미친 사이클로 반복된다. 이리들은 관계를 이용해 인간의 빈틈을 교묘히 파고들어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러다 이들은 집단에 소속되고 자신의 드디어 진리를 안다, 드디어 답을 찾았다는 느낌이 심취된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이지 소속감이 사랑의 다른 말은 아니다.
이제는 하나님 당신도 궁금합니다.
왜 당신은 아직도 이것을 용인하고 계십니까.
자신이 답을 찾았다고, 자신의 '종교'만이 답이라고 말하는 그 선언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깨지지 않은 에고가 자리잡고 있다. 에고문제의 답을 찾고싶다면 그들이 걸어간 삶을 보면 된다. 하나님이 답이시고 예수님이 답이시라면서도 그들의 삶에는 여전히
사랑없는 광적인 전도, 그들종교 머릿수채우기, 그를 통한 집단안에서의 지위차지 혹은
지적/영적 허영을 채우는 광적인 '말씀공부'
'우리의 진리'로 타인을 개종시켜 우리영광구하기 만 있을 뿐이다.
그들의 정신개조대상에는 이미 그리스도인인 사람도 제외가 아니다. 진리를 '나'만 안다는 그 생각때문에.
이곳에 더 진짜인 말씀이 있다고, 더 진짜인 복음이 있다고 그걸 모르는게 불쌍하다고.
그들이 만들어낸 숫자는 어디에서 온 숫자인가? 그들이 주장하는 더 진짜인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확신은 교만일 뿐이다. 입으로는 성경을, 신을 얘기하지만, 결국 내가 진짜입네 하는 자기자랑에 조금도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영광만을 구하고 있다.
왜 성경말씀을 일주만에, 한달만에, 일년만의 공부로 다 안다고 생각할까. 읽고 읽어도 모르겠는게 말씀인데. 세상공부도 해도해도 끝이 없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성경공부는 왜 몇개월과정으로 끝내려고 할까. 왜 그런 말도안되는 커리큘럼을 만들고 기적을 바랄까. 그걸로 왜 자신이 성경을 이미 모두 다 안다고 자부할까.
왜 구절만을 문맥에서 떼어내서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할까. 마치 자신없는 주장을 할때 구절구절마다 권위있는 책에 기대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라도 해서 거짓을 숨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 설교는 온갖 문맥없는 코테이션 마크로 가득하다. 왜 그들은 죽음 종말 예언으로 인간에게 불안을 조장할까. 그들은 왜 비유풀이에 집중할까. 책을 전체로 읽지 않고는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알 수가 없는데. 왜 그들은 구절에서 고개를 들어 고통이 있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까.
물음들이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되고 내 안에 들어차서 밖으로 터져나올때까지 재생산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족전체가, 한 집단이 그런 곳에 들어앉아 이스라엘 역사와 과학을 들먹이며 조악한 다큐영상과 사진자료를 들먹이며 이것보세요 성경이 진짜지요,하는 초등적이고 폭력적인 믿음강요 말씀 사경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을 두눈으로 직접 보니, 도리어 내 안에 사랑없음을 보게된다. 이들은 어쩌다 이곳에 다 모였는가. 닭대가리처럼 고개를 끄덕여 새로운 닭을 무리로 포섭하기 위해? 아니면 외로운 타지에서 어찌저찌 무리와 어울리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도 이렇게 평온해보이는걸까? 세대와 세대를 걸쳐 문화와 문화를 걸쳐 이런 끔찍한 사고틀이 반복되고 전해져내려온 것인가. 이렇게 말씀을 듣고 밥을 먹고 잠을 자다 죽는걸까. 사람들은 그 속에서 나올수가 없다. 아프라삭스는 소설 속 이야기인것만 같다.
성경이 진짜인지 믿을 수 있는 건 그런 오래된 다큐자료를 들이민다고 믿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설령 자신이 그런 것들로 진리를 알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자신이 진리를 안다는 느낌에 심취해 성경에 고개를 쳐박고 들지 않는다. 그들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한없이 진지하다. 넥타이와 양복을 멋들어지게 입고 웅장한 건물안 진지한 강대상, 진지한 기계들 그리고 더 진지한 통역사까지 대동해 대중을 압도한다. 자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다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진지하게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메시지와 메신저는 분리될 수 없다.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순간적인 말이 아니라 그들이 걸어간 장기적인 삶이 그 메시지가 가짜임을 증명할 뿐이다. 나의 믿음 역시 내가 걷는 길로 진위가 드러나겠지. 구글에 쳐보니 이사람들은 대외적으로 별다른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물의를 일으키지 않아서 조용한 이단이라 부른단다. '조용히'. 그 말이 오랫동안 입가에 맴돈다. 조용히 잘못된 것을 믿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자신의 고민을 단 몇개월만에 몇 년안에 해결하려는 것은 헛된 욕심이다. 너무 삶이 힘들고 숨이차서 생기는자기사랑이자 교만이다. 죽을때까지 고민을 안고 살려는 인내가 없으면 사람은 죽거나 미친다.
할수만 있다면 한명한명 붙잡고 말해주고 싶다
곧바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금당장 이 모든 고민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도 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기적적인 해답들에 속지 마십시오. 당신이 찾는 해답은 당신이 걸어온 궤적으로 진위가 증명될 것입니다. 당신이 당장에 그것을 증명하려 할 필요도, 할 수도 없는것입니다.
당신에게 기회를 주세요 헤매고 고민하고 방황할 기회를 주세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순간적 기적을 바라지않고, 할수만있다면 가장 오래도록 평생을 알때까지 말해주고 또 말해주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