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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랑꼴리한 말미잘 Feb 01. 2022

최초의 여자

88년, '이곳에 살기 위하여'

  드디어 나도 여자 연기를 해보게 되었다. 연기가 하고싶어 연극반을 기웃거리다 국문과 마당극에 둥지를 튼지 어언 3년째. 남자 역만 주구장창 하다가 결국 최초의 여자역을 맡았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내가 문화부장이 되었다. 아마도 하고 싶었을것이다. 욕심이 있었다. 필생의 역작을 만들리라!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게 많았다.

  1988년이었다. 국가적으로 첫 올림픽이 열리는 역사적인 해였지만, 나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제 1회 전국 민족극한마당이 열린 것이다. 70년대 탈춤 부흥운동과 창작극 운동, 그리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정치적 상황에서의 문화적 역할.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마당극은 비약적 발전을 했. 그 결과물로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가 발족하고 1988년 제 1회 민족극한마당이 서울 미리내소극장서 열렸다. 당시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옆에 있는 작은 소극장이었다. 마당극에 빠져있는 나에게는 종합선물세트같았다. 그동안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각종 탈충 강좌와 마당극 강좌를 찾아다니며 마당극 공부에 매진하고 있던 차였다.

  광주 놀이패 신명의 '일어서는 사람들', 놀이패 한두레의 '한춤' 극단 현장의 '횃불', 놀이패 새뚝이의 '양아치'등을 보았다. 마당극의 색깔은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일어서는 사람들'은 광주항쟁을 다룬 작품으로 남도 특유의 질펀함이 묻어있는 작품으로 여운이 진하게 남았다. 나는 마치 아이돌을 좋아하듯이 공연에 출연한 남자 배우들을 흠모하기도 했다.


  국문과 선배님의 소개로 놀이패 한두레의 심규호 선배을 연출로 만나게 되었다. 규호 선배 말로는 처음 만날때부터 내가 깐깐하게 굴었다고 한다. 우리 국문과 마당극이 엄청 대단하며 연출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더라는 것이다. 나이도 꽤 많고 전문 문화패였던 선배에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규호 선배는 외대 탈춤반 출신으로 중문과를 나왔는데 특이하게도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고 운동권 활동에 열심이었던 많은 선배들을 보아왔던 터라 공부하는 연극쟁이는 생소했다. 대학원도 다니고 춤도 추고 마당극도 하고, 아울러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었으니 규호 선배는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출연진 단체사진. 맨 윗줄 노란티셔츠가 연출을 맡았던 규호 선배

  새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우리는 캠퍼스 잔디밭(영근터라 불렸다)에서 열심히 탈춤을 배웠다. 규호 선배는 탈춤도 일품이었지만 입담도 좋았고, 노래도 많이 가르쳐주었다. 연습이 끝나면 항상 뒷풀이를 했는데 가난한 대학원생이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학교앞 맥주집에서 서비스안주로 나오는 땅콩을 수없이 리필하던 선배님 모습이 떠오른다. 조금 창피하기도 했지만, 선배님은 언제나 유머러스하게 그 위기(?)를 극복했다.  한 학년 후배인 용선이가 선배를 좋아해서 꽤 따르는 편이었고 옷 선물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 용선이네 집에서 옷 도매상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서로 좋아한다고 싸우거나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선배님 후배인 외대 탈반 선배들도 많이 오셔서 우리 공연을 도와주었다. 탈반의 젊은 남자들과 섬씽이 있을만도 한데 내가 알기론 별 일이 없었다. 나도 그중에 잘생긴 선배 하나를 살짝 좋아한 적은 있는데 그 뿐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누가 누구를 좋아했던 일들이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공식적인 관계로 발전한 사이는 없었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나라는 전체적으로 대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길거리 노점상들이 내몰리고 판잣집은 철거되었다.  학교 근처의 상계동(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지만)은 여기저기서 밀려들어온 이주민들이 모여사는 대표적인 달동네, 판자촌이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골목 양쪽으로 정말 한평 남짓밖에 안되는 작은 집(방 한칸보다도 작은 집)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반영해 88년도의 마당극 주제는 도시빈민에 대해 다루기로 했다. 86년에 상계동에서 철거중이던 건물에서 놀다 건물이 무너져 오동근이라는 8살 어린이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소재로 전체 이야기는 새롭게 구성을 했다. 근대화의 물결에 밀려 서울로 떠밀려온 두 가족- 오씨네와 이씨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재개발과 부동산투기,  도시빈민의 구조적 문제점을 다루었다. 작품 제목은 '이곳에 살기 위하여'.

공연티켓 (당시는 연도를 서기가 아닌 단기로 표기하거나, 1945년를 기점으로 통일염원 00년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당시 연습일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겨울방학이었던 2월 5일 첫 모임부터 공연, 평가회까지의 기록이 담겨있다. 몇 달 간의 치열했던 주제토론에서부터 대본창작, 연습, 공연까지의 과정들이 담겨있는 기록이다. 비록 전문 극단은 아니었지만 방과후, 주말, 휴일을 반납하며 한땀 한땀 소중하게 준비해갔던 어린 여학생들의 연극 도전기가 눈물겹다.


  가난했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도시빈민들의 모습을 너무 암울하게만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난데없이 웃기는 장면들도 많았다. 나는 공연을 책임져야 하니 배역에 큰 욕심은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이씨네 가족의 할머니 역할을 맡게 되었다. 동네 최고령인 간난이 할머니 역이었다. 전원일기의 일용이 엄니와 당시 호랑이할머니로 유명하던 우리 할머니가 섞인 캐릭터였다. 말도 많고 막무가내 할머니로 마을 대책회의에서 마이크를 잡자 무작정 노래를 불러제끼는 장면이 있었는데 당시 유행했던 현철의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봐'를 열창(?)하여 관객들의 인기를 끌었다.

열창하는 간난이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한복치마와 고무신을 빌려 입고 머리에는 흰 칠을 하고 주름 분장을 하고 출연했다. 당시 공연을 보러오셨던 엄마와 할머니 사진이 남아있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는데 사진 속의 엄마는 지금 나보다 젊은 나이였을 것이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밤마다 연극 연습한다고 늦어서 걱정이 많으셨는데 그래도 공연을 보러오셨다. 내 연기가 어땠느냐고 묻자 엄마는 아는 사람 나오면 편히 못 보겠다고 그냥 좀 어색하다고 말씀하셨다. 잘 했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섭섭) 사진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두 분이 공연을 보러오셨는지 기억 못할뻔 했다. 다시한번 그때를 돌아보니 두 분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몰려온다.

나, 할머니, 엄마.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으셨네.

  진짜 초등학생으로 보아도 믿을만한 동근어린이 역할의 소지, 그리고 언제나 열심이던 애진이, 정미, 현대, 윤경이, 수경이, 선경이....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데, 그때는 왜이리 너희들이 어려보였던지? (나한테 섭섭한게 많았어도 다 용서해주길) 영원한 연극 동지 은숙이 (은숙이 특집을 한번 써주기로 약속했다)를 비롯한 동기, 후배들. 모두 그리운 사람들이다.


  그것이 나의 연기인생에서 최초의 여자 역할이었다. 3년간 마당극을 하면서 소년, 청년, 아저씨 역할들을 맡아왔는데, 마침내 맡은 최초의 여자 역할은 80대 할머니였다. 그래도 마냥 좋았던 젊은 시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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