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세대들은 ‘87년’하면 아마도 비슷한 추억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해 뜨거웠던 여름. 자욱한 최루탄 연기. 나였을 수도 있는 대학생의 죽음. 그리고 해방구와 같았던 명동, 남대문, 시청 앞.
잊혀져가던 그때의 기억을 영화 ‘1987’이 다시 돌려놓았다. 그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어린 후배들은 영화로 1987년을 배운다. 아버지가 6.25 이야기하듯 우리는 1987년을 이야기한다.
서두가 길었다. 1986년 대학에 입학하여 우아한 연극반 생활을 꿈꿨던 내가 마당판에서 탈춤을 추고 허름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농촌 총각 연기를 하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마당극은 관객들의 폭발적 호응을 얻었고, 나는 어릴 때부터 그토록 하고 싶었던 연기의 맛에 몹시 취해버렸다.
객석의 관객들 사이 사복경찰들이 서 있기도 했고, 공연 전 대본을 모두 찢어 화장실 변기에 내려버릴 정도로 엄혹한 시기였다. 아직은 전투경찰들이 교내에 들어와 시위하는 학생들을 때리고 잡아가기도 했다. 운동권들 사이에 매일같이 벌어지는 투쟁 노선에 대한 논쟁에 염증이 나기도 했다. 그 시절 나에게는 마당극이 유일한 희망이자 열정을 쏟을 대상이었다.
보통 겨울방학이 되면 다음 해 3학년 중의 한 명이 문화부장으로 선임이 되어 본격적으로 정기공연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된다. 85학번 명화 언니가 문화부장이 되었고 다수의 86학번들이 다음 해에도 출정할 준비를 마쳤다. 많은 선배들이 졸업을 했고, 문화부장 언니를 제외하곤 3학년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외부 연출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컸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 속에 연출로 오신 분은 연희광대패의 이모 선배였다. 정확한 나이는 기억나지 않으나 20대 후반의 남자 선배였다. 전년도 연출이 고려대학교 출신으로 나름 훤칠한 외모에 멋진 춤솜씨를 보유하고 계셨던 반면에 이모 선배는 명문대 출신도 아니었고 왠지 불쌍해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어찌나 주머니 형편이 안 좋던지. 물론 연극쟁이들이 가난한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낭만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차비가 없어 고등학교 다니는 동생의 회수권을 슬쩍 해오기도 했고, 우리한테도 심심찮게 손을 벌리곤 했는데 왠지 비굴해보이는 그 모습에 조금은 실망하였다. (그 당시 버스비는 성인은 토큰을, 중고대학생은 회수권을 사용했다)
게다가 창작이란 것이 쉬운 일이던가. 전해에는 경험 많은 3,4학년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공동창작. ‘대본, 그까짓 것’ 했던 치기어린 국문과 학생들은 어느새 깊은 늪에 빠져 대본 창작을 위한 토론은 항상 원점으로 돌아오곤 했다. 진척이 없자 우리는 화살을 연출에게 돌렸고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결국 연출 선배는 연희광대패가 공연했던 마당극 ‘밥’의 대본을 들고 왔고 우리는 함께 각색을 했다.
마당극 '땅을 잃어버린 하늘' 출연진 단체사진
그 당시 멤버들은 문화부장 85학번 명화언니, 예쁘장한 얼굴에 춤도 잘 추고 연기도 잘했다. 동기 86학번으로는 나보다 더 연극에 미쳐있던 은숙이, 키도 크고 목청도 컸던 원경이, 날 으 는 돈까스(혹은 쌀가마)라 불렸던 숙희, 그리고 신입생 87학번은 용선이, 선화, 연수 등등.....
여대생이라면 예쁘게 차려입고 원서를 팔에 끼고 새침한 미소를 지으며 캠퍼스를 거닐어야겠지만, 우리는 대부분 화장기없는 얼굴에 청바지 차림으로 선머슴처럼 마당에서 탈춤을 추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성 연습을 했다.
나는 꽤 중요한 배역을 맡았다. 마당극이란 것이 하나의 줄거리나 플롯이 있기 보다는, 마당별로 독립된 구조의 연극이라서(일종의 옴니버스 형태와도 비슷하다) 여러 가지 배역을 맡게 된다. 나는 그 중에서도 '동방거사'라는 인물을 맡아 마당극에서 보기 힘든 철학적 연기를 해야 했는데, 사실 그런 역할이 별 재미는 없었다. (마당극 ‘밥’은 마당극사에서 꽤 유명한 작품인데 나는 한참 후에야 재공연되는 공연을 볼 수 있었고, 그 배역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역할인지 그제서야 알았다)
마당극 '땅을 잃어버린 하늘' 마지막 재판 마당 (나는 흰 옷을 입은 피고 동방거사, 서있는 사람이 검사 역할을 맡은 원경이)
결국 1,2학년때는 모두 남자 역할만 했다. 나도 예쁜 아나운서나 개성있는 아줌마 역할을 해보고도 싶었지만 항상 남자 역할이었다. 여자 역할이 경쟁이 치열한 점도 있었지만, 남자 연기를 할 수 있는 여대생이 많지 않아서 체구가 크거나 목소리 큰 사람이 남자 역할을 해야 했다. 용선이는 괄괄한 목소리에 듬직한 체구여서 항상 남자, 그것도 나이든 남자 역할을 도맡아 했고, 연수는 아담한 체구에 여린 목소리라 여자 역할을 주로 했다. 선화는 어린아이같이 작은 체구였지만 연출 선배에게도 대들던 깡다구가 있었다. 1학년인데 마지막 재판마당에서 개성있는 판사 역할을 맡았다. 연수에게 아줌마 역할이 주어졌는데 못하겠다고 하여 588 창녀 역할을 맡았다. ‘창녀역보다는 아줌마역이 낫지 않나?’하고 내심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연출을 했던 이모선배는 탈춤보다는 풍물을 많이 가르쳐주었다. 나는 장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수업시간에도 볼펜으로 장구채편 연습을 했다. 집에 가면 사과박스를 놓고 연습 삼매경에 빠졌다. 그 결과 치배 구성에서 장구잽이를 했다. (실력은 거기에서 거기였지만 성의를 높이 산 것 같다)
마당극 '땅을 잃어버린 하늘' 길놀이
공연 제목은 ‘땅을 잃어버린 하늘’이었다. 5월 축제 때 공연을 했다. 역시 많은 관객들이 몰려왔다. 당시 우리의 공연은 건물 사이의 중정에서 벌어졌다. 건물 사이 마당이 있고 빙 둘러 계단이 있어 야외 공연장으로는 아주 좋았다. 중정 건너편으로는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넓은 잔디마당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무렵 풍물을 치며 공연장으로 들어가던 그 때가 아련히 떠오른다.
우리집에서는 조선일보를 구독했는데 87년 1월 어느날 아침, 박종철 열사의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기사를 보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 있을까.... 학교를 비롯해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에 연일 시국성명이 이어졌고, 우리 학교 교수님들도 참여하셨다, 수업은 휴강되기 일쑤였고 매일같이 집회가 이어졌다. 나는 교내의 다른 운동권 동아리에도 참여하고 있었고, 외부에서 벌어지는 집회에도 참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학년 때처럼 공연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이런 나라에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동기나 선배들은 잡혀가고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나는 나 좋은 일만 하고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연을 하는 동안만은 잊을 수 있었다. 매일같이 방과 후 연습을 하고 나면, 배도 고프고 힘도 들었지만, 까만 하늘에 점점이 박혀있는 별을 보며 집으로 가는 길은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