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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랑꼴리한 말미잘 Sep 20. 2020

첫 작품, <쟁기>

  마당극.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성녀, 윤문식 선생이 출연한 마당놀이나 춘향전, 심청전 같은 고전을 떠올린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연극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내가 마당극으로부터 연극을 시작하게 된 것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입학하자마자 가입한 연극반은 내부 갈등에 휩싸여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어떤 예술적 가치를 추구할 것이냐 하는 첨예 논쟁이 있었던 것 같다. 결국 동아리의 중심인 3학년이 대거 탈퇴하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건 좀 나중의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 과정에서 연극반은 신입생들을 챙길 여력이 없었고, 나는 연극을 할 수 있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요즘 세상에서야 대학 동아리니 학생회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것이겠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중반은 학생들의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활동이 자유로워진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치 긴 겨울이 끝나고 새 봄이 온 것처럼 학교에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각 과마다 신입생을 학생회 활동에 참여시키려고 안달이었다.


  이쯤에서 나의 사춘기 시절을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릴 때부터 혼자 놀기의 달인이었던 나는, 언니들이 대학에 들어가자 언니들의 모든 것을 혼자 놀기의 재료로 삼기 시작했다. 그중에 큰언니가 갖다 놓은 노래책이 있었는데, 거기에 수록된 노래들은 당시 대학가에 퍼져있는 데모 노래(민중가요)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밤새도록 라디오를 들으며 음악에 심취했던 나는 서투른 피아노를 쳐가며 그 노래들을 독학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3월 초, 국문과 신입생 환영회 때였다. 어김없이 돌아가며 노래를 불러야 하는 시간이 돌아왔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당당히 일어나 '새'라는 노래를 불렀다.


'저 청한 하늘 저 흰구름 왜 나를 울리나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마지막 살의 그리움

피만 흐르네 더운 여름날 썩은 피만 흐르네

함께 답세라 아아 끝없는 새하얀 사슬 소리여...'


  가사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감옥에 갇혀 자유를 그리워하는 노래다. 당시 나는 뜻은 잘 모르고 멜로디가 좋아서 이 노래를 애창하고 다녔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김지하 시인의 시였고 작곡가는 미상이다. 그 당시 노래는 작곡자가 미상이고 구비 전승된 노래가 많았다)


  아무 생각 없이 부른 이 노래의 파장은 컸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생이 민중가요를 부르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당돌한 짓이었다. 선배들의 깜짝 놀란 얼굴이라니... 그뿐이 아니었다. 이어진 촌극 경연대회에서 우리 조는 '매 맞은 아내'를 주제로 발표를 했는데, 나는 과감히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 역할을 통해 다시 한번 나의 존재를 각인시켰다.(여대였기 때문에 남자 역할도 모두 여자가 할 수밖에 없었다)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우리 조의 촌극은 전체 신입생 환영회에서 재공연의 영광을 가져다주었으며, 나는 신입생 중에서도 당당히 톱클래스의 인기를 자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 엄마가 사주신 초록색 재킷을 입고 커트머리에 화장기 없는 하얀 얼굴의 미소년(?) 같은 모습이 나의 트레이트 마크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얼굴 시커먼 촌스러운 언니들이 많았던 학교 분위기에서 서울깍쟁이 같은 외모가 눈에 띄었던 것 같다.


  그러니 국문과 마당극 동아리에서 나를 놓칠 리는 없었다. 끊임없는 선배들의 러브콜에, 연극반 활동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고 마당극 연습에 참여했다. 마당극이 뭔지, 탈춤이 뭔지, 문화운동이 뭔지 몰랐다. 그저 연극이라고 해서 참여했고, 동기들과 선배들과  부대끼며 함께 하는 것이 무조건 좋고 즐거웠던 젊은 시절이었다. 마당극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대해 공부하고, 문화운동의 의미와 미학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공부는 어려웠지만 나는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당시 우리에게 마당극은 시대의 아픔을 담아내는다는 사회적 가치와, 공동창작과 열린 연극이라는 미학적 가치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탁차통, 탁월한 차원에서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이슈를 담되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지면 안 된다는 쉬우면서도 지극히 어려운 과제가 주어져 있었다. 특히 국문과 학생들의 창작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은 그 누구에게 뒤지지 않아서 대본의 완성도를 위해서 밤새워 토론하고 집필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탈춤이었다. 연극이라고 하면 근사하게 차려입고 멋진 대사나 읊조리면 될 줄 알았는데, 기본기로 탈춤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봉산탈춤 기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탈춤을 배우기 위해서는 '오금질'이라는 동작을 기본적으로 해야 했다. 오금질은 '덩닥기 덩딱 얼쑤'라는 타령장단을 입으로 크게 소리 내며 기마 자세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동작이었다. 자세를 제대로 잡기도 어려웠지만 한 두 번만 해도 장딴지가 아파온다. 피티 체조하듯이 오금질 열 번, 스무 번을 겨우겨우 해내고 나면 잘 걷기도 어려웠고, 다음 날 때쯤 되면 화장실에서 쭈그려 앉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다들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시피 했다. 워낙 몸치, 운동치였던 나는 탈춤을 배우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열심히 하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는 나에게 선배들이 구제불능라고 하기까지 했다. ㅠㅠ)


  발성연습을 할 때는 가장 기본이 크게 소리 내기였다. 야외에서 공연을 해야 하는 데다가, 당시에는 와이어리스 마이크도 없던 시기였던지라 육성으로 대사를 전달해야 하니 큰 목소리는 필수였다. 매일같이 목청 돋우는 연습을 했고, 과 마당극 동아리의 주제가인 '광야에서'를 미친 듯이 생목으로 불러댔다.


'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


  누가 더 세게 지르나 내기하듯이 소리 지르며 노래 부르던 때가 기억난다. 새로 배우는 노래들이 재미있어 열심히 불렀다. 기본기 연습과 대본 창작, 사이사이 막걸리 뒤풀이까지..... 상상했던 연극반 생활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매일매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살았다.


  작품의 소재와 주제는 당시 사회적 이슈 중의 하나를 골랐는데, 소값 파동으로 자살한 영농후계자 오한섭 씨의 사례를 극화하기로 했다. (물론 신입생인 내가 정한 것 아니고, 이미 정해져 있었다) 3, 4학년 선배들의 주도로 대본 창작이 이어졌고, 신입생들도 참여하여 대본을 완성해나갔다. 그리고 당시 마당극 전문단체였던 놀이패 한두레에서 활동하던 선배가 연출로 왔다. 그는 허여멀건한 얼굴의 체격이 호리호리한 선배였는데, 여대에서 볼 수 없는 남자 선배라 여학생들이 많이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별다른 관심은 없었고 연습에만 매진했다.  


 마당극은 주로 전통 탈춤의 양식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여 각 마당별로 독립된 형식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의 작품은 오한섭 씨 사례와 그와 관련된 사회풍자적 장면들을 함께 구성하고, 오한섭의 막내 여동생을 사회자로 설정한 독특한 서사극 구조를 갖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 대학가와 예술계에 유행했던 브레히트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우리 농촌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의 제목은 "쟁기"였다.

<쟁기> 대본이 실린 민족극대본선 2

  이 작품은 당시 대학에서 만들어진 여러 작품들과 더불어 우수한 마당극으로 꼽히며, 마당극 대본집인 민족극 대본선 2 [대학극 편]에 실리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내가 맡은 배역은 오한섭의 남동생과, 권투시합 심판, 동네 아이 등이었다. (마당극 배우들은 대부분 다역이다) 특히 오한섭의 남동생은 말을 더듬는 캐릭터였는데, 작품 전개에 꼭 필요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오한섭의 비극적 사건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었던 것 같다.

그토록 기다리던 첫 연극의 첫 배역이 말더듬이 농촌총각이었다. 처음엔 좀 당황했지만, 그 배역이 좋았다. 첫 대사는 "크.... 크. 큰일났슈"였다. 장면이 시작되면 팔을 휘저으며 소리를 지르며 판으로 뛰어 들어온다. 형의 죽음을 알리는 장면이다. 말 더듬는 대사가 어려웠고, 대사가 많지는 않았지만 수없이 연습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출 형이 한 마디 했다. "얘는 말을 더듬을 뿐이지, 바보는 아니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말을 더듬고 어리바리하게 연기를 하면 친구들이 재미있어하고 잘하다고 하니까 점점 과장된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좀 더 진지하게 연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친구들이 공부도 하고 미팅도 하고 다양한 대학 생활을 즐기는 동안, 나는 매일같이 연습을 했다. 귀가가 늦어지면서 부모님의 근심과 꾸중도 늘어났지만, 나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공연이 다가오면서 공연할 중정에서 리허설이 계속되었다. 늦은 밤, 우리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은 학교 마당에서 하늘의 별을 보며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며 연습하던 때가 생생하다.


  5월 말, 학교 축제가 시작되었다. 싱그러운 초록이들이 반짝이고 가벼워진 옷차림의 남녀 대학생들이 웃고 떠들며 학교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첫 공연이 다가오면서 나의 긴장감은 극도로 고조되었다. 두 달간 공연 말고는 생각해보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지만 첫 무대에 대한 공포감은 컸다. 공연 전날 꾼 꿈에서는 대사를 잊어버려 온 세상이 하얘지는 꿈을 꿨다.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공연은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너무 떨려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는지 후회가 막심했다. 그저 연습한 대로 움직이고 말하고 할 뿐이었다. 마이크도 없고 의자도 없는 야외무대, 어느새 꽉꽉 들어찬 관객들과 함께 공연은 점점 뜨거웠졌다.

<쟁기>의 한 방면. 오한섭의 죽음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가족들

  3회에 걸친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학교 축제의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인기 있는 것이 국문과의 마당극이었다. 공연 중 아는 3학년 선배 두 명이 갑자기 머리를 뽀글뽀글 볶고 관객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 앞 파출소를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고 거기에 참여했던 선배 두 명이 변장을 하고 관객들 사이로 숨어든 것이었다. 관객들 뒤 편에는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깎고 점퍼를 입은 사복경찰들이 서있었는데, 공연 중에도 내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공연은 잘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나의 첫 번째 공연도 그렇게 성공이었다.

  다들 떠나는 고향을 버리지 않고 가족들을 위해 농사를 지었고, 영농후계자가 되어 정부를 믿고 소를 샀고, 행복해지는 꿈을 꾸었지만, 어느 사이 소값은 헐값이 되었고 소를 다 팔아도 사료값 빚조차도 갚을 수 없었던 스물아홉 살의 청년 오한섭. 슬프고 아까운 그 청년의 이야기는 관객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음메, 음매, 음메...

 어디로 가오

 그대 어디로 가오

 소울음을 따라서 가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공연 중에 나왔던 노래 가사이다. 3학년 선배의 슬픈 목소리로 불린 이 노래에 배우도 울고 관객들도 울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꿈꾸던 배우 지망생은 이렇게 마당에서 데뷔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입던 헌 셔츠와 트레이닝 바지가 나의 첫 의상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아픈 이야기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연극을 해야 될지 고민스러웠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연기가 너무 좋았다. 무대와 관객이 하나 되는 연기가 이토록 행복할 수 있을까? 너무 힘들어서 이번 공연만 하고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공연을 하고 나니 그런 생각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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