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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랑꼴리한 말미잘 Sep 01. 2022

두 딸의 엇갈린 선택

대학입시 그 기로에서

  ㅇ과장네 첫 대학생의 탄생은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었다. 큰 딸 유이의 부모의 뜻에 반하는 대학으로의 결정, 그 과정에서의 폭력적인 시간들. 처음으로 겪어보는 ㅇ과장과 아이들 간의 갈등이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이후 벌어질 여러 가지 사건들의 전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누구도 그 상처를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표면적으로 집안은 평화를 되찾았다.

  1982년 봄, ㅇ과장의 큰 딸 유이는 대학생이 되었다. 친구 미현이는 가정관리학과, 유이는 철학과였다. 가정관리학과는 전원 여학생이었지만, 철학과에는 여학생이 몇 명 되지 않았다. 시커먼 남학생들이 득실거렸다. 엄혹한 군부독재 치하이긴 했으나 그래도 대학이었다. 유이는 미현이와 더불어 대학 신입생으로서 캠퍼스의 낭만을 즐겼다.


  대학생으로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옷을 장만하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내내 교복을 입었으므로 매일같이 사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유이는 엄마가 사다준 평범한 옷을 입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엄마 희의 감각도 그리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으나) 미현이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며 일반 옷가게가 아닌 곳에서 자신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옷들을 찾았다. 물론 예산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사고 싶은 옷을 다 사지는 못했으나 다양한 레이어드와 조합으로 자신만의 패션감각을 선보였다.


  그다음은 헤어스타일의 변화였다. 중고등학교 때까지 엄격한 두발 제한에 의하여 획일적인 헤어스타일을 해야 했기에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파마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이는 신중하게 미장원을 골라 파마를 하기로 했다. 유이가 처음 파마를 하고 오는 날, 인이와 연이는 기대에 가득 차 언니를 기다렸다. 뽀글뽀글 머리를 볶고 온 유이의 모습은 낯설었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연이는 왠지 언니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슬픈 생각마저 들었다.


  그다음은 아르바이트였다. 독일어가 어원인 발음도 잘 되지 않는 아르바이트라는 단어. 연이는 그 낯선 단어가 잘 발음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러나 너무나 낭만적인 말이 아닌가. 강의시간이 자유로운 대학생들은 다양한 곳에서 시간당 급여를 받고 일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은 대학생들만의 특권처럼 여겨졌다. 유이도 몇 군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아르바이트의 첫 급여를 받는 날. 맛있는 걸 사 오겠다는 유이를 동생들은 하루 종일 기다렸다. 첫 월급은 부모님의 내복을 사야 한다는 관례에 따라 유이는 할머니와 부모님의 빨간 내복을 샀고 동생들을 위해서는 먹을 것을 사 가지고 들어왔다.


  유이가 낯선 포장의 봉투를 들고 오자 동생들이 모여들었다. 왠 뚱뚱한 외국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종이 상자였는데 냄새가 기가 막혔다.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이라고 했다. 통닭이 아니라 치킨이었다. 한 마리 통째로 튀겨져 있던 통닭이 아니라 닭다리, 가슴살,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바삭한 튀김옷을 입힌 닭튀김이었다. 동생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할머니가 한 조각 먼저 드시는 것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마침내 한 조각씩 배분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아, 세상에 이런 맛이? 천상의 맛이었다.

  유이와 연년생인 둘째 딸 인이의 입시가 바로 다가왔다. 인이도 ㅇ과장의 딸로서 글도 잘 썼지만, 그림 솜씨도 뛰어났다. 특히 세밀하고 꼼꼼하게 칠하는 솜씨가 뛰어나 디자인 분야에 능했다. 미술교사는 강력하게 미대를 권유했다. 이 정도 실력이면 서울대 미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대를 가려면 남은 시간 동안 실기시험 준비를 해야 하니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담임선생은 미대를 가기에는 인이의 성적이 좀 아깝다며 미대를 반대했다.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던 인이의 성적으로 꽤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인이도 고민이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았지만 문학도 좋았다. 2학년 때 동국대 국문과에 다니는 남학생이 교생으로 왔다.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교생 선생님과 문학 이야기를 많이 했다. 교생 선생도 인이를 많이 아끼고 격려해주었다. 그 교생은 이후 바로 등단을 했는데 이후 불교적 사유가 배어있는 영상적 산문과 소설을 발표해온 작가 정찬주였다. 인이도 국문과에 입학해서 문학공부를 하고 싶다 꿈을 갖고 있었다.


  동네에 인이와 동갑내기가 많다 보니 은근히 경쟁이 있었다. 조용히 공부 잘하는 인이는 엄마 희에게는 의지가 되는 딸이었다. 키도 훤칠하게 커서 모델시켜보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큰 딸 유이는 자기 개성이 강해서 나이가 들수록 엄마 아빠의 품을 벗어나려 했지만, 인이는 조용히 엄마 일을 도와주는 착한 딸이었다. 물론 인이도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다. 유이 못지않게 예민하고 감수성이 뛰어났지만 유이처럼 겉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속으로 삼키는 편이어서 더 힘들었다. 그 힘든 시기를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에 대한 연민과 문학과 미술에 대한 애정 덕분이었다.


  세검정의 1층 방 두 개는 어느새 성장한 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한참 씩씩하게 뛰어노는 두 아들이 부부의 방을 벗어나 2층 아이들의 방으로 들어갔고, 1층 방 두 개를 하나는 유이가 혼자, 또 하나는 인이와 연이가 쓰게 되었다. 유이는 무조건 방을 혼자 쓰고 싶어 했다. 물론 친구들이 놀러 와 밤새 붙어있기 일쑤였지만.

  유이는 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그것이 인이에게는 오히려 배려심이 없게 느껴졌다. 언제부터인지 유이와 인이는 서로 말을 별로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언니 유이가 입시 문제로 부모님과 갈등을 빚는 것에 대해 인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지만, 자신의 미래가 걸려있는 대학 진학 문제를 그런 식으로 결정하는 것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인이는 일단 미대에 대한 꿈을 접고, 학력고사 준비에 매진했다. 미술은 취미로도 할 수 있으니까....


"너네 언니 몇 점 나왔어?"


세 살 터울이 많아, 연이 친구들 중에도 인이와 같이 학력고사를 치른 언니나 오빠를 둔 아이들이 많았다. 유이가 치렀던 첫 학력고사는 새로 바뀐 수험제도로 인해 시험이 다소 어려웠지만, 이번 해의 학력고사는 난이도가 떨어져 고득점이 많이 나왔다. 눈치경쟁이 더욱더 치열해졌다.


  인이도 생각했던 것보다 점수가 높게 나왔다. 전반적으로 점수가 올랐다고는 하지만 꽤 좋은 점수였다. 학교 선생들의 입시 상담도 바쁘게 이어졌다. 학교에서는 서울대 연고대 합격자를 많이 늘려야 하니 고득점자를 대상으로 적절한 지원을 해야 했던 것이다.

  고심 끝에 학교에서는 고려대학교 중문학과를 추천했다. 80년대에는 중국과 외교가 단절된 상태였지만 중국이라는 큰 대륙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 희망적인 예측들이 나돌고 있던 때였다. 앞으로 중국 관련해서 큰 시장이 열릴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관련 학과가 주목받고 있었다.

  인이 입장에서는 국문과에 가고 싶었지만, 고려대학교라는 명문대학도 포기하기는 힘들었다. ㅇ과장과 희도 흔쾌히 허락을 했고, 학교의 권유대로 지원을 했다.


  면접시험을 앞두고 이것저것 예상 질문에 대해 공부를 했다. 인이는 중국 문학은 생소했기 때문에 관련 질문이 나오면 어떡하나 다소 걱정이 되었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중국 문학이 있다면 무엇이며, 가장 기억나는 대목은 어디인가?' 예상 질문 중 하나.


"연이야, 너 중국 소설 읽어본 거 있어?"

"응. 있어"

"진짜? 뭐?"

"아큐정전"

"그게 뭔데?"


현대 중국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쉰의 대표작인 아큐정전. 신해혁명을 배경으로 당시 몽매한 중국 민중과 혁명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작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고작 중 3짜리 연이가 이 책을 읽었단 말인가?


"문학전집에 있어"

  용이와 필이가 성장하면서 큰 맘먹고 전집으로 구매한 세계 어린이 문학전집. 여기에는 어린이 동화들도 있었지만, 어린이용으로 편집한 유명 소설들도 있었다. 어린이 문학전집이라 유이나 인이는 잘 거들떠보지 않았고, 용이와 필이도 대충대충 읽었지만, 연이는 중학생이 된 후에도 그 책들을 좋아했다. 유럽 쪽 소설들은 일찌감치 다 읽고 또 읽고 했는데, 중국이나 동남아 문학들은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역사나 용어들이 낯설어 뒤로 젖혀놓았다가 결국은 읽을게 떨어지자 읽게 된 것이다.


"아큐라고 중국 사람인데 무식하고 성격도 별루야. 근데 어이없이 죽어..."


  연이에게 이야기를 들은 인이는 루쉰과 소설 아큐정전에 대해 찾아보았다. 상당히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가장 기억나는 대목 있어?"

"음... 아큐는 자기가 왜 사형당하는지도 모르고, 사형당하는 건지도 모르고 죽거든? 그런데 서류에 이름을 쓰라고 해. 근데 아큐는 글을 몰라. 이름을 쓸 수가 없는 거지... 그래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동그라미나 하나 그리라는 거야. 그게 자기 사형집행에 서명하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동그라미를 그리거든. 근데 동그라미가 좀 삐뚤어지게 그려지니까. 아큐는 그게 속상해서. 그게 몹시 마음에 걸려하거든. 그건 아무 상관이 없는 거잖아.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그깟 동그라미 비뚤어진 게.... 나는 그 장면이 가장 기억나"

"아큐는 엎드려서 젖 먹던 힘을 다해 동그라미를 그렸다.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동그랗게 그리려 했지만, 밉살맞은 붓은 무거운 데다 말을 듣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출발선까지 왔을 때 붓이 바깥으로 삐치는 바람에 와씨(瓜子) 모양이 되고 말았다.

아큐가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종이와 붓을 가져가 버렸다"  

[출처] [독서 리뷰] 아큐정전 #루쉰의 소설 / 루쉰|작성자 유땡


  인이는 그 내용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했다. 시사하는 바가 큰 대목이다. 연이도 가끔 쓸모가 있군. 항상 조잘거리며 귀찮게 하는 동생이었지만 그래도 필요할 때가 있다. 인이는 소설을 읽어볼 시간이 없어서 연이가 이야기해준 내용을 잘 정리해서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면접시험에 그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인이는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합격했다.

  ㅇ과장과 희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대견한 일이었다.


  이렇게 ㅇ과장의 두 딸은 한 해 차이로 대학생이 되었다. 정반대의 선택. 그것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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