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기획자인데… 왜 보험을 팔고 있죠?
서비스 기획자도 피해갈 수 없는 보험사의 영업 실습
내가 입사한 곳은 보험사였다.
우리회사 아님보험사는 보험을 파는 곳이다. 모든 신입사원은 보험 상품에 대한 교육을 받은 후에 실제로 보험을 판매해보는 실습을 거친다. 영업, 언더라이팅, 상품, 자산운용, 디지털 직군 모두 동일하다.
저는 생명보험과 변액보험을 판매할 수 있습니다.
보험을 판매하려면 보험 설계사 등록 자격이 있어야 한다. 신입사원 교육기간에 생명보험, 제3보험 그리고 변액보험 판매 자격증 공부를 했다. 4지선다 시험이고 커트라인만 넘으면 합격인 시험이다.
생명보험 팔수있다! 암보험 팔수있다!
변액보험 팔 수 있다!결과는 둘다 합격.
생명보험이랑 손해보험이랑 뭐가 다른거야?
입사 전에는 나도 정확히 같은 질문을 했었다. 내가 보험사 입사했다고 하면 "자동차보험 너네회사걸로 들어야겠다"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종종 있었는데...자동차보험은 손해(화재)보험사에서 취급한다. 내가 다니는 곳은 생명보험사이기 때문에 자동차보험을 판매하지 않는다!
내게도 숨겨진 보험이 있을까?
영업 현장으로 나가기 전에 보험 판매 역할극을 했다. 우리가 공략할 페르소나는 '보험 가입을 꺼리는 20대 사회초년생'이었다. 서로의 보험을 조회하는 것으로 역할극을 시작했다. 고객의 동의 하에 모든 보험사에 가입되어 있는 보험을 조회할 수 있다. 가입을 권유하는 측은 "젊을 때 가입해야지 보험료가 싸다"는 전략을 펼치고, 방어하는 측은 "주식 투자 할거다" "돈이 없다" 등의 반박을 했다.
역할극을 하면서 나 몰래 부모님이 들어주신 보험을 발견하기도 한다. 종합건강보험, 암보험, 종신보험, 실손보험.... 빈틈없이 완벽한 보험 포트폴리오가 짜여져 있는 친구들이 몇몇 있었다. 모두들 그 친구 자리로 몰려가서 구경하고 부러워했다.
반면에 가입된 보험이 0개인 사람들도 있다. 이들을 업계에서는 '백지고객'이라고 부른다. 계약화면이 백지와도 같다는 뜻이다. 내가 바로 그 백지고객이었다! 그 흔한 실손 보험도 없는 진정한 백지고객이 접니다...!
고객님~ 제가 보험 조회해드릴게요~
열심히 설명해주는 나자격증도 따고 연습도 했으니 이제는 실전이다! 2주간의 실습 기간동안 친구들을 열심히 만나 영업을 했다. 보험영업의 가장 기본은 지인영업이니까! 보험 가입내역을 조회해주고, 각각의 보험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줬다. 보험료와 보험금의 차이, 생명보험과 손해보험의 차이만 설명해도 다들 엄청 만족한다.
친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거 해약해도 돼?"였다. 그동안은 부모님이 보험료를 내주셨지만, 대학을 졸업하면서 본인들이 직접 납부해야해서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보험은 중도에 해약하면 손해가 크도록(보험사가 먹고사는 방법) 설계된 상품이 많기 때문에 웬만하면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 이 이상으로 설명해주고 싶지만... 나도 잘 몰라서 상품계리 동기들한테 물어봐야한다.
체험은 늘 즐겁다. 곧 끝나니까.
결국 나는 보험을 한 건도 못 팔았다! (실손이라도 팔걸 그랬나) 나도 가입하지 않은 상품을 가입하라고 권유하는게 어려웠다. 나도 백지고객이면서 "고객님 이거 정말 좋은거예요"라는 말이 도저히 안나오더라. 공감 안가는 일을 하는게 어렵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그럼에도 끝이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영업관리직이 아니면 부서 배치 후에도 영업현장에 나갈일은 없다. 실습때 만난 선배들도 "너가 언제 또 영업현장에 나와있겠니"라고 했었다. 그들의 말처럼 나에게 실습 기간동안 부담없이 회사에 대해 알아갈 수 있었다.
신입공채의 목적은 회사에 맞는 인재를 선발하고 길러내는 것이다.
회사는 이유 없이 시간과 돈을 쓰지 않는다. 이런 교육 왜 시키지? 이런 실습 왜 시키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회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이다. 약 3개월에 걸친 교육 및 실습 기간동안 내가 업무를 하게 될 (할 것이라고 기대한) 서비스 기획에 대한 교육은 없었다.
나는 보험사에 신입 공채로 입사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