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합니다' 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기분이 살짝 언짢았던 기억이 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이과 쪽 꿈을 꿔본 적도 없고, 온 집안 식구들이 모두 문과였기 때문에 문과로 가는 진로 설정이 이과에 비해 낙후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급작스레 '문과니까 무조건 죄송하다'는 말은 화를 돋우기 딱 좋았다. 문과생은 취업이 안되고, 기술을 배울 수도 없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만 하다가 이상한 사고방식에 물들어 졸업한다는 선입견이 지배적이라는 사실도 그 때야 알았다. 화를 내려다가 이내 마음을 접은 이유는 일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1996년도에 대학에 입학할 무렵, 각 대학에서 '학부제'라는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고 당시 매우 문과생들의 로망이었던 '신문방송학과'에 가기 위해 '사회과학부'라는 학부로 입학을 했었다. 1학년 전공탐색 시간을 거치며 '신방과'는 너무나 적성과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과 은근 '정치학'이 재밌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느낌이 좋았던 '정치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복수 전공하기에 이른다. 그 때 즈음 1997년 12월에 IMF가 터지고 졸업을 앞둔 99년 가을부터 취업시장은 완벽하게 얼어붙었다. 그냥 아무도 뽑아 주지 않았다. 무작정 토익 점수를 올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토익 시험 준비를 하고 일반 상식 책을 외우고 있노라면 저기 멀리 약대생들이 약사고시 시험공부 중인 모습이 보였다. '이 시험만 통과하면 나는 약사가 된다'는 그 늠름한 자부심이 뒤태에서 보이는 듯했다. 어쩌면 청춘을 도서관에서 삭히는 시간의 총량은 같은데 '정해진 종착역'이 있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에서 비롯된 지극히 주관적인 이미지였을 지도 모른다.
그때는 한창 '의약 분업'으로 의약계가 시끄럽던 시절이기도 했다. 절친이 의대생이었는데 '기자 준비를 하는 너의 시각에서 작금의 사태를 어찌 생각 하냐'며 전화가 왔었다. 아직 어떤 언론사에서도 신규 채용 공고가 없었던 위기 상황에서 매일 22000개의 영어 단어장을 끼고 살던 암울한 시기에 갑자기 훅 들어온 그 질문에 완벽한 동문서답을 했다.
나는 그냥 의사 고시 패스하면 의사가 되는 네가 부럽다.
다시 태어나도 의사나 약사가 될 적성은 아님에도 하루하루 조여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청춘의 시간을 엄습할 때면 '정해진'길에서 노력하는 그 시간에 대한 부러움은 지울 길이 없었다.
어쩌면 이 부러움의 씨앗이 자라고 뿌리를 내려 지금의 '문송' 사회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정치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하지 않고 의대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내심 안도했던 이유는 나의 불안했던 청춘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죄송할 이유까지 있을까?
입시 설명회에 가보면 정치학이나 철학과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없다. 문과는 경영학과가 아니면 취급대상에서 제외되는 분위기였다. 공부를 못하면 문과를 갈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전락한 시대의 단상 앞에 서서 뼛속까지 문과인으로 허탈하면서도 이해도 되는 인지부조화를 겪는다. 그래도 죄송할 이유는 없다. 불안한 청춘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시간들이 쌓여 새로운 자신을 만나고 미래를 바라보는 지혜가 자랐으니 말이다.
대학에서의 배움을 취업으로만 연관시키는 분위기가 사라질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아이들이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칸트와 헤겔을 강독하고 니체의 '초인'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귀신 씻나락을 까먹는 소리'라고 할지언정 읽고 생각하는 훈련을 청춘에 해본 경험이 불혹이 되었을 때 사회에 융합되는 힘을 준다는 진리를 어떻게 하면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 자의든 타의든 문과에 발을 내딛고 '문송하다'는 자책을 하고 있는 한 세상의 진리는 암흑에 묻힐 것이다.
어떤 일이 불합리하다는 것이 그것을 폐지해 버리는 최우선적인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불합리하기에 오히려 그 같은 일이 필요로 하는 첫 번째 조건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각자의 자리가 있고 그곳에서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아가 있다면 문과의 힘으로 지구를 떠받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거시적인 생각을 해본다. 채용 공고에 우선 채용 대상 학과가 아니더라도, '왜 그런 전공을 선택했냐'는 인사말 같은 질문에 당혹스러워도, 가끔 답답한 책을 읽다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이 들지라도 그대의 길에 자존을 세우길. 그 모든 기술은 철학과 역사 위에 세워졌음을 기억하고 종국에 우리가 '어벤저스' 임을 우리끼리라도 북돋워주길. 그러므로 결코 '문송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