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2년에 팔꿈치가 헐어버린 이야기
최대한 냉동식품과 즉석 조리 식품은 먹지 않았습니다. 라면도 주말에 가끔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전자파가 안 좋다고 난리가 났었던 2006년에 태아에게 좋지 않다는 뉴스를 접하고 치워버린 전자레인지 이후로는 단 한번도 전자레인지도 사용하지 않고 17년을 버텼습니다. 나름 기특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미련한 짓이었다는 걸 코로나 터지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가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한 아침을 먹으면 점심은 각자의 일터와 학교에서 먹고 저녁도 아이 학원 픽업가서 먹고 오기 일쑤였으니 실제로 집밥을 먹는 날의 수가 한달이면 열흘 정도 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같은 동네에 친정 부모님이 계셔서 거의 매일 저녁을 얻어 먹는 신세였으니 신문물에 의지할 필요따위 없었을 뿐 '건강을 위해 안쓰겠다(사실 건강과 큰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죠)' 라는 확고한 마음은 아니었을 겁니다.
여튼 팬테믹은 재택과 온라인 수업을 통해 생전 처음 '삼시세끼' 지옥을 선물했고, 2년을 버틴 결과 테니스 라켓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제가 '테니스 엘보' 진단을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손가락 관절염이 시작되더니 엘보와 인대 염증까지 겹쳐서 통증으로 밤잠을 설치는 지경에 이르고서야 '신문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가전 '블랙프라이데이' 빅세일 기간에 좋은 '신문물'을 드디어 집에 들였습니다. 개울가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서 '빨래는 손 맛이지' 라며 방망이질을 했던 어떤 분이 집에 세탁기를 들였을 때 이런 기분이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변화가 오기도 전에 먼저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 변화에 둔감한 사람, 변화를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100% 1번이라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마케팅이라는 시장 최전방 분야에서 만족도 조사를 하고 카피 문구를 짜고, 시장을 돌아 다니고,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며 우쭐거렸지만, 정작 주방의 최전방에 '뭣이 중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다 알고 있고, 트렌드 세터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은 테니스 엘보와 함께 스크레치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곳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꼭 그 열광의 도가니에 동참할 필요는 없지만 열광의 이유를 확인하는 작업은 필요합니다. 너무 당연한 이치임에도, 나이가 늘어나면서 '자만심'도 늘어서 쓸데 없는 고집을 피울 때가 있습니다. 고집을 피우면 변화에 둔해지고 마음이든 몸이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일흔이 넘은 친정엄마가 "미련 떨지 말고 문명을 받아들이라"는 충고에 아랑곳 하지 않고 버티다가 매일같이 쏟아셔 나오는 냄비와 후라이팬을 닦으며 '테니스 엘보'가 왔듯, 또 다른 고집으로 나를 망가뜨리고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 봅니다.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다 안다 병'. 내 생각은 그저 나의 생각일 뿐,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남들 다 있는 주방가전 하나 들이고는 문명을 논하고 있는 레벨이라니, 그동안 17년 가까운 시간을 마케터로 일한 경험은 무엇이었나 반성해 봅니다. 메타버스는 알고 있으면서 정작 주부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탓에 실적이 그 모양이었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기말고사와 단축수업을 끝내면 2달간의 긴 겨울방학입니다. 넘치도록 먹성이 폭발 중인 고1 아들과 집구석 프리랜서를 선언한 엄마, 그리고 저녁에는 어김없이 집밥을 드시는 아빠, 3인 가족은 문명의 이기로 편안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