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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balist Feb 17. 2023

향락의 도시에 일하러 왔습니다.

CES 2023 리얼 후기


한 해가 열리는 시기에 세계적인 IT쇼 ‘CES’가 라스베가스 도시 전역에서 시작된다. 구글, 아마존, 소니 등 최정상의 브랜드뿐만 아니라 LG, 삼성 등 우리나라 토종브랜드 또한 역사적인 행사에 자리를 꿰차고 다가올 미래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박람회다.


우리 회사, 아이데틱도 CES에 빠질 순 없다. 크리스마스가 지나자, 전 직원이 봇짐을 싸매고 베가스행 비행기를 탔다. CES가 끝나면 회사 워크숍도 현지에서 할 예정이어서 프로젝트의 긴장감과 동시에 해외 워크숍이라는 설렘이 덤으로 따라왔다. 우린 시차로 쌓인 피로가 무색하게, 화려하고 뜨거운 베가스의 중심에서 2023년 카운트다운을 위해 모였다. 베가스 도로에는 차가 다니지 못하게 경찰들이 통제하였고, 반짝거리는 옷, 토끼머리띠 등 다양한 개성을 드러낸 사람들이 새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운트다운을 20분 앞두고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져도 사람들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고, 우산을 쓰지 않았다. 음악에 몸을 맡긴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거 같았다. 우리도 그 속에서 흠뻑 비를 맞으며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3! 2! 1!
Happy New Year!  



항상 수줍게 웃던 동료가 양손을 하늘로 찌르며 춤을 추고, 조용히 일만 했던 동료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해피뉴이얼"을 외쳤다.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닥까닥하는 낯선 동료의 모습이 귀엽고, 모두가 망가짐을 허용하며 그 순간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시간만큼은 일에 대한 걱정은 마음 한켠에 두고, 다 같이 어깨동무하며 눈과 입으로 크게 웃었다. 모두의 행복을 기원했다. 시작은 그러하였다.


라스베가스 중심에서 "Happy new year!" 을 외치다!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미국의 트레이드쇼는 유럽, 아시아와 큰 차이가 있다. 전시장 소속 인력, ‘Union(유니언)’의 존재이다. 전시 부스에 TV 한 개를 설치해도 유니언 labor의 손을 거쳐야 한다. 전기 배선, 목공 작업 등 한국인만큼의 빠르고 깔끔한 노동력을 기대하긴 어렵다. 시간당 인건비도 높아서 어물쩍거리는 태도를 볼 때마다 직원들의 속이 타 들어가곤 했다. 그들의 속도로 인해 우리의 시간은 불편하게 흘러간다.


이 밖에도 ‘Drayage fee (a.k.a. Material Handling)’라는 게 있어, 전시장에 반입 반출되는 자재, 물품들의 무게(kg)마다 비용을 청구한다. 대표님은 수년 동안 CES 프로젝트를 해오면서, 여러 번 속 터지고 답답한 경험을 했기에 “I hate US trade show!”를 말하곤 했었다.

해외전시를 기획할 때, 멋진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시장 규정, 절차에 맞는 여러 상황들을 모두 고려해서 준비해야 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특권이 주어지지 않기에, 멋진 디자인보다는 합리적인 디자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올해 포스코그룹의 CES 전시와 부대행사를 총괄 기획하고 운영을 맡았다.

5개월의 준비 과정에 비해 빛을 발하는 기간은 고작 4일.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부스 제작과 리허설을 하는 7일 정도의 현장 작업이 있다.


CES 2023 전시 현장 착수!


역전의 용사들


전시 현장은 말 그대로 한시를 지체할 수 없는 전시(戰時) 상황과 같다.

CES 오픈일은 다가오는데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는 시공이 우리 발목을 잡았다. 침묵을 유지하시던 대표님은 갑자기 두 팔을 걷고 일어서서, 마감이 지연될 수 있는 문제점들을 하나씩 해결하자고 하였다. 그중에서 그래픽 작업은 유니언이 하는 걸 기다리기엔 시간이 촉박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우리는 각자 일을 하다 말고 그래픽 시공에 투입되었다. 유니언의 인건비를 내고, 우리가 노가다를 하는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 미국 전시에는 인내심과 체력이 필요할 거라는 현지 팀장님의 충고를 격하게 체감하며 새벽까지 작업이 이어졌다. 그래픽뿐만 아니라 조명 설치, 가구 배치, 전선 정리 등 각자 주어진 포지션에 맞게 바쁘게 움직였다. 현장 구석에서 쪽잠 자고 커피를 드링킹 하며, 이번 프로젝트가 문제없이 완료되길 바라는 시그널을 보내면서.


노숙 아니고 전시(戰時) 상황


큐브 형태의 메인 LED가 장시간에 걸쳐 설치되었다. LED에 상영되는 콘텐츠 또한 우리가 제작하였는데, 현장에서 3D로 영상을 구현해 보니, 약간의 디테일을 위해 보정이 필요하였다. 지금 잠이 중요하랴, 라스베가스 현장에 있는 디자인 팀장 Kimmi와 서울에 있는 영상팀이 시차를 넘어 협업하여 영상을 완성시켰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으로 보이던 영상과는 확연히 다른 LED 연출은 포스코에서도 기대 이상으로 느꼈던 것 같다. 현장감이 더 느껴질 수 있도록 영상에 모션을 추가하는 등 추가적인 요구사항들이 갑자기 생겨났다. Kimmi는 한정된 시간 동안 영상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전시 오픈 하루 전날까지 영상 제작에 영혼을 불태웠다.


키미(Kimmi)팀장의 영혼이 담긴 'LED 영상' 리허설


Kimmi가 자신의 생일도 잊고 영혼을 갈아 넣을 때, 우리는 몰래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1월 2일이 생일이라 현장에서 보낸 적이 많았다던 팀장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Kimmi가 케이크 없는 생일을 보내게 될까 봐, 몰래 케이크를 준비하였다.

생일자인 Kimmi는 우직하게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고 우리는 숨어서 케이크 초에 불을 붙였다. 행여 전시장 관리자에게 걸릴까 봐 노심초사,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철공과 목재가 쌓인 삭막한 전시장에서 생일축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어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바쁜 현장 상황이지만 소소하게나마 Kimmi의 생일을 함께 축하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생일초를 불며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두의 마음이 훈훈해지는 특별한 밤이었다.


Happy birthday to Kimmi �

 


일만 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힘들게 일해도 창의력과 에너지를 보충해 주는 건 편안한 잠자리와 문화생활이다.

라스베가스의 베네치안 호텔은 도시 중심에 높게 뻗어 전시장과도 가까운 동선을 갖췄다. 베네치아를 재연한 운하, 눈부신 샹들리에와 고상한 천장화, 슬롯머신 기계와 카지노 칩들, 눈이 휙휙 돌아가는 쇼핑몰, 오락의 모든 걸 갖춘 호텔이었다. 이곳은 관찰만 해도 즐거웠는데 우린 숙박을 하였다. 미라지 호텔에서 베네치안 호텔로 옮기면서 직원들의 설레는 표정이 감춰지지 않았다. 해외워크숍도 어깨가 올라가는 일이지만 고급호텔에서 묵는다는 건, 좀처럼 미소가 숨겨지지 않는 걸?


우리의 보금자리였던 베네치안호텔


포근하고 넓은 침대에 몸을 밀어 넣고 취침을 하는 게 휴식형 회복이라면, 체험형 회복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곳의 문화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다.


라스베가스에는 3대 뷔페와 3대 쇼가 있다. 우리는 3대 뷔페 중, 코스모폴리탄 호텔에 있는 위키드스푼으로 향했다. 근사한 분위기에 저 세상 비주얼을 자랑하는 디저트, 군침이 절로 났다. 한국 같으면 샐러드로 가볍게 시작하겠지만, 따뜻한 소고기와 딤섬, 때깔 고운 대게 다리를 가져와 무수히 접시를 비워냈다. 다양한 인종들이 왁자지껄 하는 사이에서, 음식으로 즐기는 경쾌함이라니!


라스베가스에 오면, 꼭 쇼를 관람해야 한다는 대표님의 추천에 다 같이 카쇼(Ka show)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갈채를 보내는 공연인만큼, 입장하자마자 남다른 스케일에 우리는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오프라인 이벤트를 기획하는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연출들이 많았다. 동료들과 공연 리뷰를 하면서 직업병이 여실히 드러났다. 다각도로 회전하는 무대와 곳곳에서 터지는 화염, 물과 모래를 활용한 연출 요소를 보며 우리가 하는 일감과 연결시켜 바라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대표님은 늘 직원들에게 "가능한 많이 다녀보고 경험하라"고 말했다. 좋은 음식을 먹어보며 깊이를 알고, 좋은 숙소에 묵으며 가치를 느끼고,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며 아이디어를 얻고, 얼마나 심도 있게 겪어봤느냐에 따라 생각의 폭이 확장될 테니.

결국 우리가 하는 기획일의 8할은 경험력이 아닐까,


베가스에서 꼭 해야 하는, 순례와도 같은 리츄얼들을 하나하나 경험하면서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아이데틱의 라스베가스 리츄얼 (위키드스푼 & 카쇼)



코로나가 삼켜버린 워크숍


CES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세상의 뉴스는 온통 CES로 도배가 되었다. 포스코 전시도, 포럼도 성공적이었다. 시간 순삭이 이런 느낌이구나. 마지막 날, 전시장을 나서면서 항상 그랬듯 후련함과 동시에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전시장에서 멀티플레이어로 운영을 하였던 동료 Kay가 긴장이 풀렸는지, 차를 기다리면서 풀썩 주저앉았다. 사실 어디서든 앉아있는 걸 잘 보지 못했는데,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동료들은 Kay를 걱정하며 이제 다 끝났으니, 베가스에서 즐기기만 하면 된다며 행복 회로를 돌렸다. 우리에겐 워크숍 5일이 남아있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놓는데 메신저 단체창에 사진이 올라왔다.


다시 봐도 양성 (Kay가 쏘아 올린 코로나)

코로나 자가진단키트에 두 줄이 선명하게 보였다. Kay였다.


Kay는 격리할 수 있도록 방을 옮겼고, 일주일을 동거동락했던 동료들이 감염될 수도 있기에 SO팀 담당자 Amy는 자가진단키트와 약을 공수하러 부리나케 움직였다. 낯선 타국에서 코로나는 우리나라 병원만큼 대응을 해주지 않는 게 사실이다. Kay가 있는 호텔룸 문고리에 약과 음식을 걸어 놓으며, 그녀가 하루빨리 예전처럼 방글방글 웃으며 나타나길 모두가 바라고 있었다.


이틀이 지나자, Kay와 같은 방을 사용했던 Mila도 코로나 양성이 나왔다. 역시 예외 없는 코로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전날만 해도 라스베가스에서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무상하여, ‘앤터로프 캐년’을 가고 더스트랏 호텔 전망대에서 놀이기구를 탈 계획을 세웠었는데 맥없이 무너졌다. 악천우까지 겹쳐, Kimmi 팀장은 식중독 증상이 찾아와 복통을 호소하며 거동 조차 할 수 없었다.

전시는 끝났지만 다시 전시상황이라니.

SO팀은 마치 보급부대처럼 아픈 직원들을 위해 베가스 구석구석 차를 몰고 다니며 약과 키트, 음식,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였다. 그 옆에 있던 나도 한바탕 전쟁을 치른 기분이었다.


총 맞아 죽는 사람보다 역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다고 했던가.

코로나 확진자 한 명이 더 속출하였다.


우리.. 괜찮을까?


 

장수는 병사를 버리지 않는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 3명의 코로나 환자와 1명의 식중독 환자가 시들시들하게 짐을 싸고 있었다.

대표님은 원래 LA로 가는 일정이 있었지만, 아픈 직원들을 챙겨야 할 거 같다며 인천행으로 비행기표를 변경하였다. 지금 같은 난세에 장수는 병사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나 보다. 훌륭한 장수는 진두에서 전쟁불사를 외치기보다, 후방까지 남아 병사의 생존을 지켜주는 것이다.

대표님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고국으로 돌아가는 병사들의 짐을 택시에 실어주며 떠나보냈다.



다시 찾아온 불청객


이번 코로나는 바이러스 경험이 전혀 없는 동료들에게 찾아왔었다.

이미 두 번의 코로나 아픔이 있었던 나에게, 코로나가 오다가도 도의상 달아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얄짤 없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양성 통보를 받았다.


세 번째 코로나는 체념 또는 수용하게 된다. 비를 피하지 못한 채 맞으면 더 이상 비를 피하지 않듯이, 코로나 치명률이 나에게 어느 정도 인지 알기에 두려움도 없어지더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코로나도 양심은 있는지 경미하게 지나갔다.




 

CES 2023 x EIDETIC


미국 출장을 되새겨 보면, 혹독한 시간이 많았다.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고 코로나로 인해 서로 지치고 예민해진 순간들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도 등을 토닥여주는 동료가 있었고, 너무 무겁지 않게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는 대표님이 있었다.

세계적인 박람회를 참여하며 시야가 넓어졌고, IT기술의 확장을 오감으로 느끼며 우리가 하는 일에 동기부여도 되었다. 우리의 든든한 아군인 대표님과 업계에서 실력 있는 유학파 동료들, 좋은 사람들과 함께 24시간을 붙어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료들이 일하는 방식, 전략과 태도, 노하우를 옆에서 지켜보며 배웠고, 훗날 웃으며 술안주 삼아 얘기할 수 있는 추억이 생겼다는 것도?


아, 이참에 워크숍은 다시 해야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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