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비 때문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그동안 가물었던 것들을 한 번에 해갈하겠다는 듯이 그렇게 퍼부어 댔다. 이런 빗속을 조금이라도 걸었다간 신발이고 옷이고 다 젖을 게 뻔하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등교를 하고 등원을 해야 한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깨우고, 먹이고, 입히고 내보내는 것은 모든 엄마의 일과. 이 엄마가 다른 점이 있다면 재택근무자란 사실.
오늘은 우산까지 들려 등교, 등원시켰다. 이제부터 엄마는 일을 한다. 점심시간을 넘기고 나면 곧 막내 하원 시간이 도래한다.
초등 5학년인 첫째, 초등 2학년인 둘째는 알아서 자기 스케줄대로 방과 후 수업이며, 학원을 들렀다 오고, 그동안 나는 막내를 유치원에서 픽업해서 간식 먹이고 놀게 해야 한다.
뭐 늘상 해야 하는 루틴이긴 한데, 오늘은 조금 더 복잡하다. 둘째 예방접종으로 소아과에 데려가야 하고, 막내 바이올린 학원을 보내야 하는 미션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거기다 비가 엄청 쏟아지고 있다.
동선을 잘 짜야한다.
일단 막내를 픽업해서 간식 먹이고 좀 놀게 했다가 시간 맞춰서 학원에 데려간 후, 다시 집으로 가서 방과 후 수업을 마치고 온 둘째를 데리고 소아과로 간 다음, 접종을 마치고 막내를 데리러 가면 시간상 로스도 없고 완벽한 세팅이다..라고 처음엔 생각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온다. 그것도 너무 많이 온다.
집으로 가는 길. 마침 방과 후 수업이 끝난 시간과 얼추 맞아 학교 쪽으로 지나쳐왔다. 하교하는 둘째가 보이면 태울 심산이었다. 그런데 안 보이네.. 혹시 집으로 벌써 갔나?
부랴부랴 집으로 들어갔지만 아직 둘째는 오지 않았다. 곧 오겠지. 그 틈에 일 좀 보고 있는데 20분이 지나도 둘째가 오질 않는다. 곧 막내 학원도 마칠 시간인데 어쩌지? 점점 엄마의 맘은 타고.. 결국 방과 후 선생님께 전화를 건다.
"어? 30분에 마치고 집으로 갔는데요? 아직 안 왔나요?"
전화를 끊고 부랴부랴 아파트 13층 부엌 창문을 열어 아래를 훑었다. 혹시 놀이터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때 마침 익숙한 빨간 우산이 눈에 들어온다. 옳지 이제 오는구나.
이제 30분도 채 안 남았다. 엄마는 마음이 급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둘째 손에 들려진 가방을 낚아채듯 내려놓고 얼른 녀석의 손을 이끌어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하 1층에서 내려 차에 올라타고 소아과로 달려간다. 그전에 예약어플로 예약한 대기인원을 체크한다. 아싸 대기자 1명. 가자마자 맞출 수 있겠구나. 그럼 제시간에 막내 픽업 가능하겠다는 계산까지 완벽. 그러나 대기 1이 사라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뒤로 밀린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도착했는데 주차자리는 또 왜 이리 없는지.. 아니 옆 차는 좀 선 옆으로 좀 대지 바짝 대서 문도 못 열게..
맘 급한 엄마는 자꾸 예민해진다.
겨우 소아과에 도착하니 이미 대기에서 밀렸다. 하지만 다른 대기자가 거의 없어서 어쨌든 다음이다. 예방접종 문진 체크하고 접종력 확인하는데 또 시간이 좀 지체된다. 마음은 급한데... 역시 내 맘대로 되는 건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으며 급하게 학원 선생님께 문자를 날린다.
'한 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좀만 늦어도 미소 지으며 한소리 하시는 원장쌤을 마주하기 편친 않지만 오늘은 어쩔 도리가 없다.
둘째 어깨에 주사를 맞고 나니 딱 막내 학원 끝나는 시간.
얼른 둘째 손을 붙들고 주차장으로 가서 막내 학원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여기도 주차장에 차가 그득이네. 비 온다고 전부 차 들고 나왔을 테니 그럴 테지. 와중에도 애써 이해하려는 엄마. 문득 대견하다고 느껴본다.
엄마가 급하니 아이도 급해져서 빗물이 흥건한 주차장 바닥을 내달리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방금 주사까지 맞아서 어깨도 아픈데 엉덩이까지 찧었으니 어째.. 그 와중에도 안아주고 달래주고 하면서 스스로 탓해보기도 한다.
10분 넘어 겨우겨우 막내까지 닿았다.
"어머님, 이 시간이 좀 어려우시면 좀 더 늦은 시간 수업은 어떠세요? 자꾸 늦으시면 그게 나을 수도 있어요. 호홋"
역시나 원장쌤이 웃으며 한마디 하신다. 늦게 픽업한 적 별로 없는데.. 울컥 억울한 마음이 솟았지만 어쩌겠어. 늦은 건 늦은 거지.
둘째 소아과 때문이라며 양해를 구하고 돌아섰지만, 맘이 편친 않았다. 문자도 보냈는데.. 살짝 억울함도 솟는다.
아이들을 태운 차가 주차장을 나와 빗길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가 오면 차가 많다. 여기저기 학원 차량들, 픽업 차량들로 왕복 2차선 도로가 지그재그 길이 돼 버렸다.
그래도 집으로 가는 길은 그나마 맘은 편하다. 비도 약간 소강상태가 됐다. 그런데..
"엄마 너무 배고파"
"나두 배고파아아"
아이들이 배고픈 새끼 새 마냥 삐약삐약 짖어댄다. 시간을 보니 거의 6시네. 곧 배고파하며 학원에서 돌아올 첫째 모습도 아른거린다. 귀여운 녀석들.. 차암 귀여운데 말이지..
근데 엄마는 왜 이리 진이 빠질까.
집에 가면 저녁 준비를 하고 간식으로 옥수수를 쪄야겠다.
'후두두두둑'
잠시 멎는 듯했던 비가 또다시 세차게 창문을 때린다. 와이퍼도 내리는 비에 맞춰 열심히 빗물을 걷어냈다.
오늘 하루 내린 비로 도로에 물이 많아졌다. 차가 지날 때마다 ‘촤아악 촤아악’ 물 튀는 소리가 한편으론 시원하기도 하다.
비가 다시 퍼부으니 또 가는 속도가 느려지겠지. 집이 바로 코앞인데도 여전히 차가 많다.
엄마에게는 왠지 어느 때보다도 긴 하루다. 그렇다고 옆에서 삐악 대는 귀여운 녀석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득 차창을 때려대는 비가 얄밉게 느껴진다.
그래. 이게 다 비 때문이다.
이 비가 오늘 내 기력을 죄다 뺏어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