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껴줘..
유치원 마지막 학년인 막내는 우리가 이 동네로 이사 오고 난 이듬해 공립 유치원을 다닐 수 있었다.
유치원 특성상 5살부터 쭈욱 함께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이렇게 중간에 들어가면 초반엔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엄마 입장에선 그런 문제들을 좀 걱정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동네엔 딱히 친한 사람도 없고, 지인도 없어서 친구 만들기는 거의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수준이었기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파트 단지 내만 잠깐 돌아다녀봐도 엄마들이 젊어 보여 이미 40대 중반인 내가 어떻게 끼어 들 수나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니 애들은 어떨까. 너무 솔직해서 잔인하기까지 한 애들인데, '너랑 안 놀아, 쟤랑만 놀 거야.' 실제로 이런 말 하는 애들도 봤으니 엄마는 두려움까지 생겼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적응해 주는 아이들.
새로운 환경에 낯설고 두려운 맘이 들 법도 한데, 세 아이 모두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친구들한테 다가가 먼저 같이 놀자고 말하기도 하고, 나도 같이 하자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생각보다 빨리 적응할 것 같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면서 뭔가 기특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두려움을 이기려 애쓴 것 같아 짠하기도 했다. 뭐 모든 엄마들이 이런 맘일 테지.
그리고 어느 날인가부터 드디어 놀이터 원정이 시작됐다.
유치원 부근에 있는 공원에 놀이터가 있다. 하원 시간이 되면 늘 아이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우리도 하원하다 같은 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합류한 것을 기점으로 매일같이 방앗간 들르는 참새처럼 들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놀이터팸이 결성됐고, 나에게도 이 새로운 미지의 동네에서 지인이란 대상들이 생겨났고, 막내에게도 절친이라고 부를만한 친구들이 생기게 됐다.
처음엔 재밌었고, 즐거운 맘도 있었다.
그런데 놀이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엄마들은 마냥 아이들 노는 것만 보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이따금씩 이 시간들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도 그런 게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딱히 접점이 없으니 이야기가 이어지기 힘들었고, 개인사를 이야기하기엔 깊은 관계도 아니었고, 유치원이나 학원 얘기도 한두 번이면 더 이상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었다. 침묵을 극도록 불편하는 입장에서 어떻게든 대화 소재를 마련해 보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접었다.
그런 와중에 돌봄반 애들이 하원을 해서 놀이터로 몰려든다. 여기서 잠깐 설명하자면, 공립 유치원은 일반반과 돌봄반으로 나뉘며 각각 끝나는 시간대가 다르다. 돌봄반은 좀 더 늦게 끝난다. 이 돌봄반 애들이 놀이터로 몰려들면서 한바탕 기존 애들과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중간에 들어온 우리 막내는 돌봄반 애들과 접점이 하나도 없는 상태다. 이미 이 전부터 유치원을 다니던 아이들은 서로서로 인사하며 떠들썩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만 보던 막내가 보였고, 그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여 집에 가자고 청했다. 평소와 달리 순순히 따르는 막내가 왜 이리 안쓰러워 보일까. 그 후로 귀가 시간은 자연스럽게 돌봄반 애들이 하원하기 전에 집에 오는 걸로 잠정 결정된다.
이젠 노는 친구들이 세 네 명으로 딱 정해지게 됐다. 이젠 학원을 다니는 애들이 슬슬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한창 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와 막내는 조금 앞 서 걷고 있었다.
뒤에서 아이 A가 아이 B의 집에 가고 싶다는 얘기가 발단이 되었다.
그러자 B의 엄마는 내일 오라고,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아이 C의 엄마에게도 내일 아이를 보내라는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나 우리에겐 전해지지 않은 이야기. 아마도 이전에 약속된 이야기였으리라 그렇게 애써 셀프 위로를 하고 있는데, 아이코 우리 아이가 다 들어버렸다.
막내는 시무룩해하며 "나도 가고 싶은데..." 라며 중얼거렸고 나는 또 그 맘을 읽고 "그럼 한 번 물어봐~"라며 하지 않아도 될 응원을 하고 만다.
아이는 B에게 "나도 가도 돼?"라고 묻지만, B는 장난치듯 아무 대답 없이 씽씽카를 타고 달려가 버리고, 막내는 쫓아가며 묻는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또 막내 뒤를 좇아간다.
다음날 유치원을 마치고 B와 막내는 근처 상가에서 진행하는 체험 클래스에 같이 들어갔다. 끝나고 놀이터에서 잠깐 놀면 좋겠다고 나도 막내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체험장소 앞에 A가 엄마와 함께 기다리고 있네. 아 어제 한 약속이 있구나. 그때서야 떠오른 어제의 일. 여전히 막내에게 권유가 없는 거 보니 우린 가지 않는 게 낫겠다 싶어 '우리 먼저 갈게요~' 라며 아이를 데리고 가려는데 이미 아이 맘은 서운함으로 가득 차 있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도 끼고 싶은데.. 나도 껴주지.. 하고 있으니 이걸 어쩌나.
엄마는 아이의 속을 생각하니 화가 불쑥 올라왔다.
거 참 얘한테도 함 물어봐주지. 애를 이렇게 대놓고 서운하게 하나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중 A가 막내가 속상해하는 걸 눈치채고는 "다음에 너도 같이 가자"며 위로한다.
A의 엄마도 상황을 눈치채고, A를 데리고 다른 길로 가면서 "내일 보자~"하면서 인사했다.
에이 저런 게 먹힐 리가.. 이미 심사가 뒤틀린 엄마는 연기도 다 눈에 밟혔다.
그런데, 이게 먹힌 걸까, 아니면 속 깊은 막내의 체념일까.
막내는 이내 눈물을 그치고 자기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는 안쓰럽기도 하고, 문득 슬픔이 차오른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도 엄마의 서운한 맘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젠 다 잊고 거실에서 블록 놀이에 빠져 있는 막내도 아직 서운함이 남은 것만 같이 보인다.
그렇게 한두 시간이 흐르고, 오빠들도 오고, 다시 집이 왁자지껄 정신없는 틈에 내 서운했던 맘도 스르륵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그 틈에 보이지 않던 A와 B 엄마의 난감함이 떠 올랐다. 뭐가 됐건, 그들의 약속이 있었을 테고, 그들의 관계가 있었을 거라고 이해하고 싶어졌다. 괜히 서운한 감정에 몰두해서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이대로 서운해해 봐야 좋아질 건 아무것도 없으니.
B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괜히 A, B 엄마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다고 울 애는 지금 괜찮다고,.'
그리고 다 그린 무지개 들고 활짝 웃고 있는 아이를 쳐다봤다.
부디 상처받지 않았으면.. 아니 그 말은 내게 적합한 말인 것 같다.
너무 애쓰지 말자. 사사로운 감정을 안고 있으면 예민해진다. 예민함은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불러오고, 아이들에게도 전염되니 좋지 않은 생각이 들 때면 차라리 환하게 웃어보자. 웃음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준다고 하잖은가. 아이는 벌써 저렇게 환하게 웃는데 엄마만 바보같이 자기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우물쭈물 대서야 쓰겠나.
정신 차리자. 육아는 결코 쉽지 않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