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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y Aug 22. 2020

행복의 끝을 찾아서 I

해외유학. 꼭 가야만 할까?

때는 바야흐로1이라는 숫자 대신 2가 시작되는 2000년, 밀레니엄 시대가 시작되는 해였다. 한국의 IMF가 끝났고 내가 좋아하는 H.O.T. 오빠들은 점점 더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으며 나는 좀 더 힙 해지기 위해 엄마를 졸라 오빠들이 입는 옷을 하나하나씩 따라 사기 시작했고 부모님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절친 K와 함께 노래방, PUMP, 스티커 사진 찍기와 골라먹는 아이스크림에 우리의 용돈과 열정을 쏟아부었다.


가족보단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게 좋았던 중학교 때, 엄마의 적극적 공세로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말이 좋아 해외여행이지 강원도 교육청에서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주최하는 ‘청소년 과학 캠프’였다. 부산에서 크루즈로 일본 후쿠오카로 가는 4박 5일간 여정이었다. 처음 타보는 크루즈 내에 일본어로 써진 자동판매기도 후쿠오카에서 방문한 소방서, 과학관과 박물관, 그리고 원숭이가 많던 공원도 모든 게 다 과학이라는 단어와 맞아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을 가는 친구들은 전교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심지어 서울과 부산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친구들이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그때, 나는 첫 해외여행에 매우 만족했고 그 여행을 계기로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와 드라마, 음악의 흠뻑 빠져 살기 시작했다. 원빈보다 기무라 타쿠야를 좋아했으며 삼성보다 도시바나 소니 제품을 더 많이 이용하였고 천계영의 ‘오디션’을 너무 좋아하지만 ‘꽃보다 남자’를 포기할 수 없는 그런 학생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지금처럼 부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문화에 푹 빠져버린 나로서는 부모님 몰래 친구들이랑 시외버스를 타고 이대입구 뒷골목까지 친히 방문하여 만화책도 사고 L'Arc~en~Ciel (라르크앤씨엘) 라이브 CD도 사 오는 등 사춘기에만 가능한 일들에 열중하였다.


그렇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만끽하던 중, 아버지께서 캐나다 유학을 권하셨다. 아버지 친구분 자녀가 나와 같은 나이인데 캐나다 밴쿠버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며 너도 더 넓은 곳에 가서 살아보지 않겠냐며 말이다. 아버지의 권유는 너무 달콤했다. 사실 학원 갔다 밤늦게 오고 다시 학교 가서 비몽사몽 했다가 주말에 또 학원을 가야 하는 10대의 고리타분한 생활이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공부에 특출 난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매우 엄하신 아버지 덕분에 학업에 열중해야 했으며 특히, 국영수사과는 점수가 안 나오면 크게 혼났기 때문에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혼나는 게 무서워서 열심히 공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더 큰 물에서 열심히 공부해 보라는 아버지의 말씀보다 일본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달콤함에 빠져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면 부모님의 공부해라 라는 말도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더 행복한 삶은 없을 것만 같았다.


캐나다 유학 준비를 하면서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유학원을 컨택하셨고 학교는 아버지 친구분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로 지원하기로 하였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의 성적이 있기 때 문에 10학년부터 시작하면 되고 내가 다니게 될 학교에 ESL 수업이 있어서 영어 수업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유학원에서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엄마는 내가 가는 게 그다지 내키지 않았는지 갖고 싶어 했던 것을 다 사 줄 테니 가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도 엄마에겐 너무 미안하지만 10대의 나는 엄마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버지의 권유대로 유학행을 결정하였고 학생비자가 준비되는 데로 캐나다로 출국하기로 하였다. 당시, 캐나다 학생비자 인터뷰를 위해 자기소개와 내가 왜 유학을 가고 싶은지에 대해 영어로 열심히 연습했지만 통역관님이 친절히 설명해주셔서 자기소개만 짧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두둥. 모든 준비가 척척 진행되는 줄 알았으나 9.11 대테러가 내 발목을 잡게 될 줄 몰랐다. 그로 인해 내 비자 발급은 더 늦어졌고, 세 달간 학교도 가지 않고 집에서 반려견들과 뒹굴거리며 자퇴생으로 지내었다. 유학은 전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에 자퇴를 했어야 했다.  세 달 후, 2001년 11월 27일 나는 엄마와 함께 앞으로 내가 홀로 살아가게 될 단풍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앞으로 다가올 내 암흑기를 생각지 못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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