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남편의 것

강한 동기가 이끄는 그림 실험

by 붱draw

“난 언젠가 마당이 두 개인 집에 살고 싶어. 앞마당엔 꽃을 심고, 뒷마당엔 채소를 키울 수 있게. 그게 내 꿈이야. 당신 꿈은 뭐야?”


내 질문에 남편이 대답했다.


“나는 평생 글 쓰면서 살고 싶어. 동화책 내서, 인세로 여행 다니면서 글만 쓸 수 있으면 좋겠다.”


2년 전쯤의 대화다.


그리고 작년 봄, 남편은 책으로 만들고 싶은 이야기 한 편을 완성했다. 게다가 일러스트가 들어갈 자리를 비워 두고 글만 먼저 넣은 더미북 - 출판 전 책의 전체 구조를 미리 만들어 보는 샘플 -까지 만들어 두었다. 이제 그 빈자리를 내가 채우면 된다. 우리는 출판사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우리가 창작한 동화가 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이야기는 남편의 것이다.




남편이 이야기를 완성했을 때, 나는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많이 배운 시간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늘 지쳐 있었다. 퇴근 후엔 오롯이 쉬어 주어야 다음 날 출근이 가능했다. 남편도 그 사정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일러스트 작업을 바로 시작하지 못해도 재촉하지 않았다.


작년 9월, 우리는 싱가포르로 이주하며 또다시 정신없는 몇 달을 보냈다. 남편은 새 직장에 적응하고, 나는 전업주부로서의 일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 사이 남편은 이야기를 다시 다듬었다. 이제는 정말, 그림만 남았다.


그런데, 그림을 담당하고 있는 내 작업 속도가 영 시원치 않다. 쉽지 않은 시작이었지만, 틈틈이 작업해서 책 전체 장면을 작은 스케치로 빠르게 구성하는 썸네일(thumbnail) 작업까지는 마쳤다. 하지만 그다음, 스타일을 정하고 채색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멈춰 있다. 모작(master study)을 통해 스타일을 만들어내려 했지만, 아직은 뚜렷한 결과가 없다.


참고용으로 빌려본 책들 중에 ‘The Napping House’가 있다. 아내인 Audrey Wood가 글을 쓰고 남편인 Don Wood가 그림을 그린 책이다. 글과 그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마치 한 사람이 작업한 것처럼 느껴진다. 남편이 쓴 이야기에 어울릴 그림을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부부 공동 작업의 롤모델이자 부러움의 대상이다.

PXL_20260324_033949500.PORTRAIT.ORIGINAL~2.jpg 아내인 Audrey Wood가 글을 쓰고 남편인 Don Wood가 그림을 그린 동화 'The Napping House'


최근 ‘Big Magic’을 읽었다. 작가 Elizabeth Gilbert는 창작자가 두려워하는 것들을 두 페이지가 넘게 나열했는데, 그중 하나가 내 두려움과 정확히 겹쳤다.


당신은 다른 누군가가 당신보다 그 일을 더 잘 해냈을까 봐 두렵다.

내가 멈춰 있는 이유이자 내 작업의 가장 큰 동기. 내가 이 작업을 끝내지 못하면, 남편은 다른 사람과 작업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일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쓰린 일이다. 이 작업을 놓고 싶지 않다. 우리 둘이 함께 만드는 첫 작업이니까.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이제 별 의미가 없다. 이미 시작했고, 썸네일도 끝냈고, 지금도 조금씩 그리고 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지만,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다.


남편이 쓴 이야기에 내가 그림을 더해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


남편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보고 가야 할 길이다.


다음 글에서는 더미북에 들어갈 몇 장면이라도 완성했다는 이야기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여덟 번째 그림 실험 보고서>


실험 제목: 강한 동기가 그림 작업을 지속시키는가?


실험 목적: 남편이 쓴 이야기를 함께 완성하고 싶다는 강한 동기가 작업 속도 지연과 두려움 속에서도 그림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실제 동력이 되는지 확인하기 위함.


실험 계기: 남편이 완성한 동화 글에 어울릴 그림 작업을 시작하고, 스타일 확립과 채색 단계에서 작업이 멈춰 있는 상태를 경험함.


동시에,

- 이 작업을 끝내지 못하면 남편이 다른 일러스트레이터와 작업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

- 우리 부부의 첫 창작물을 함께 완성하고 싶다는 마음

이 두 감정이 동시에 작용,

‘강한 동기’가 실제로 작업을 이끌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함.


실험 방법:


작업 지속: 썸네일 스케치 완료 후 다음 단계를 고민하고, 결과가 당장 나오지 않아도 여러 방법을 실행함.

스타일 실험: 모작(master study)과 참고 자료를 활용하여 색감, 선, 표현 방식을 탐색함.

감정 관찰: 작업 과정에서 느끼는 두려움, 부담, 책임감, 그리고 동기를 함께 기록하고 분석함.

동기 자각: ‘남편이 쓴 이야기를 함께 완성하고 싶다’는 마음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며 작업에 대한 의지를 다짐.


실험 가설: 외부 보상이나 확신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개인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강한 동기가 존재한다면 창작 작업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실험 결과(현재 단계):

- 썸네일 및 장면 구성 작업 완료.

- 스타일 확립 단계에서 속도는 느리지만 완전히 멈추지는 않음

- ‘다른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반복적으로 발생함

- ‘이 작업을 놓고 싶지 않다’는 동기가 작업을 다시 이어가게 만듦

- 강한 동기가 작업의 속도를 빠르게 하지는 못하지만, 중단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음


실험 소감: 창작을 지속하게 만드는 힘이 항상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더 강하게 작용할 때 작업은 이어졌다. ‘잘할 수 있을까’보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큰 힘이 될 수도 있다.


다음 과제:

- 채색 및 스타일 확립을 통해 더미북 장면 일부 완성

- 작업 속도보다 ‘지속’에 초점을 맞춘 루틴 유지

- 강한 동기가 실제 결과물 완성까지 이어지는지 계속 관찰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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