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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Oct 26. 2024

이븐하게 익은 하루

아동 상담사의 고백

퇴근 길 



엄마 고구마가 이븐 하게 익지 않았어요

엄마 채소가 이븐 하게 익지 않았어요 

엄마 두부에 양념이 이븐 하게 스며들지 않았어요 

흑백요리사라는 요리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고 아들들이 '이븐 하게'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Even'은 사전을 찾아보면 '평평하게, 고른, 균일한'이란 뜻이다. 큼직한 고구마가 고루 익어야 하고, 채소가 균일하게 익어야 한다. 두부에 양념이 고르게 잘 배여야 한다 말을 '이븐 하게'를 넣어서 말한다. 


퇴근하려고 창문을 닫을 때 보이는 노을을 보며 늘 같은 생각을 한다. 오늘 만난 아이들의 삶이 평온하길, 오늘 만난 아이들의 엄마 마음이 평탄하길, 오늘 만난 아이들의 가정이 평안하길 바란다. 


고백하자면, 20대에 상담사로 일을 시작할 때는 상담센터 안에서 마주하는 아이들의 힘든 마음과 엄마들의 지친 표정을 행복하게 바꾸어 주고, 싱글벙글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만들어 주고 싶은 행복과 싱글벙글을 위해 부단히 애쓰며 상담했다. 상담책도 많이 읽고, 퇴근하고 늦게까지 공부했다. 주말에는 상담 관련 교육을 듣기 위해 바빴고, 평일에는 상담이론을 적용해 보느라 애썼다.  


그렇게 20여 년이 지났다. 이젠 행복과 싱글벙글을  만들어 주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단히 애써보고 깨달았다. 상담이 어려웠던 이유는 목표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과 엄마들이 겪는 지침에 대해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그 땐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해결에 방향을 두고 달리는 상담을 했다. 


이젠 아이들의 말, 놀이를 애써 분석하느라 놓친 아이 자체를 본다. 지친다고 눈물 흘리는 엄마를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나 방법을 생각하느라 놓친 엄마 자체를 본다. 흘러가는 대로 이야기하고, 놀이하며 함께 한다. 흘러가는 대로 듣고, 공감하며 함께 한다. 놀라운 것은 애쓰면서 만났던 때보다 좋은 해결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상담사로 일했던 처음을 돌아보면 부끄러운 것이 많다. 그중 가장 부끄러운 것은 요술쟁이가 되어 짜잔 하고 내담자들을 변화시키기고 싶었던 마음이다. 뭔가 대단하고 유능한 나를 보여주고 싶었던 생각이다. 20년이 지났고, 많은 내담자들은 나를 성장하게 도왔다. 지금 원하는 것은 힘주지 않고 이븐 하게 익은 상담을 하는 것이다. 드라마틱 하게 변하는 아이들과 엄마들의 모습을 바라지 않고, 이븐 하게 익은 하루를 기대한다. 




행복과 싱글벙글보다는

이븐 하게 익은 하루를 위해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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