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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몬 샤베트 Aug 03. 2021

우리는 라헬을 왜 미워하는가?

<신의 탑> 다시 읽기

*본 글은 애니메이션 전문 웹진 <아니나>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anination.net/Content?cd=view&ContentCode=487&CategoryCode=5&iPageNum=1)



※ 본 글에는「신의 탑」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헬이라는 캐릭터는 <신의 탑>이라는 작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일 것이다. <신의 탑>뿐만이 아니라, 네이버 웹툰 전체를 통틀어서도 3대 악녀로 꼽힐 정도로 엄청난 인지도를 자랑하는 캐릭터이며, 작중에서도 중요하게 작동하는 그녀의 역할을 생각하면, <신의 탑>이라는 작품을 볼 때 ‘라헬’이라는 이 캐릭터를 좀 더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침 <신의 탑>이 긴 휴식기를 마치고 연재를 재개했고, 라헬이 당장에 작중에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않기에 잠시 이 캐릭터에 대해 멀리 떨어져 바라볼 좋은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우리는 이 라헬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녀는 분명 <신의 탑> 주인공인 스물다섯번째밤(이하 밤)의 대척점에 위치한 캐릭터로 비춰진다. 대척점에 위치한 만큼, 분명한 악역 포지션을 차지하는 순간도 존재한다. 그러나 밤이 점점 더 강해지고, 더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라헬이라는 인물은 어떤 맥거핀과도 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거대한 시스템에 대항하고, 정해진 운명을 거슬러 맞서 싸워야 하는 밤의 여정으로 진화한 지금의 전개에서 라헬은 시스템의 톱니바퀴이자 희생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자하드와 탑이라는 거악을 상대하는 이 시점에서도, 라헬은 여전히 독자들에게 신의 탑의 메인 빌런이자 만악의 근원, 타도해야 할 무언가로 여겨진다. 그럴만한 가치가 없음에도 이렇게나 미움을 받는 라헬이라는 인물을 독자들이 미워하는 이유에 대해 한 번쯤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네이버 제공 <신의 탑> 공식 이미지



  라헬이라는 캐릭터는, 소년만화적인 밤이라는 캐릭터의 안티테제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똑같이 탑을 올라가는 입장이며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고 성장하는 과정 또한 같이 거쳐가는 캐릭터임에도, 밤의 성품, 능력, 외모 등 거의 모든 요소에서 밤의 대척점에 위치한 인물이다. 평범한 외모, 열등감과 질투, 기회주의적인 면모가 거의 그대로 드러나는 성격, 탑을 올라가면서도 주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능력까지 라헬의 모습은 모든 면에서 밤과 대비된다.


  그런 라헬은 밤이 탑을 올라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원동력이자 장애물이었고, 제대로 된 라이벌 캐릭터라고 볼 수 없음에도 작품의 초반부 가장 큰 라이벌의 포지션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더 큰 반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임팩트 있는 배신 장면 하나만 가지고 라헬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증오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니까 말이다.  


  라헬이라는 캐릭터는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자신과 대비되는 캐릭터들이 더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악행이 더 도드라지게 된다. 기존까지는 먼치킨과도 같던 밤의 주위의 인물들과 비교해 라헬의 열등감이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다면, 2부에 들어서 마찬가지로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작중 두번째 주인공에 가까운 자왕난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함으로써 라헬은 진정으로 악역에 가까운 캐릭터로 전락하게 된다.

 


  자왕난은 라헬과 마찬가지로 도드라지지 않는 외모, 탑을 올라가기에 부족한 능력, 이상적이지는 못한 성품 등 여러모로 밤 쪽보다는 라헬에 가까운 캐릭터지만, 본인의 현실을 직시하고 최선을 다해 상황을 헤쳐 나가는 캐릭터다. 그의 곁에는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신의 탑> 주역들과는 동떨어진 능력의 미생, 고생과 같은 캐릭터들이 서로의 단점을 메꿔가며 협심해 탑을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라헬의 행보는 더더욱 찌질하고 더러워 보이게 되는 것이다. 라헬의 일행이 상대적으로 라헬을 억지로 탑을 올라가기 위해 외부의 압력이 들어간 인물들로 구성되고, 팀으로써의 협동이 전무하다시피한 것과는 더욱 대비된다.  


  이렇듯 라헬의 캐릭터는 먼치킨 서사로든 소년만화 서사로든 해당 서사의 적합하지 못한 캐릭터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서사의 주인공의 라이벌이자 악역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캐릭터가 이 만화의 중심 서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한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 같은 캐릭터가 떡하니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니, 그만큼 독자들에게 라헬이라는 캐릭터가 더 미워 보이고 부적절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라헬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대체 왜 이렇게 무능력하고 부족한 캐릭터를 계속 작중에 중요한 역할로 등장시켜 독자들을 분노케 하는 것일까? 애초에 이 캐릭터가 우리가 이입하는 주인공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되긴 하는 걸까? 대체 작가는 라헬이라는 캐릭터를 끊임없이 비호감으로 만들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애니플러스 제공 애니메이션 <신의 탑> 공식 스틸컷



  아마도 라헬이 <신의 탑>이라는 작품에서 차지하는 포지션은, 작중 탑을 올라가지 못하고 낙오된 자들, 무한경쟁시스템에 낙오된 자들, 그리고 자신들을 밟고 올라가는 자들에 대한 선망과 질투, 열등감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라헬의 위치성은, 작중 밤이 이루고자 하는 어떤 목표와도 직결되는 지점이며, 단순히 먼치킨 서사로 빠질 수 있는 밤의 여정을 좀 더 현실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장치로도 작용한다.


  <신의 탑>의 메인 테마 중 하나는 밤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아무도 해치지 않고,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고 싶어하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딜레마이다. 수백 화에 달하는 연재 기간 동안 밤은 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어떤 부분은 수용하고 어떤 부분은 부조리에 맞서 싸워 나가는 모습이 이어진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 밤의 한계가 없어 보이는 무한한 성장 가능성, 먼치킨의 면모이며, 이는 어떤 구원자적인 성질을 띌 수밖에 없기도 하다. <신의 탑>을 읽는 독자들은 그런 밤의 행보를 응원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만 여겨지는 밤의 모습에는 응당 그를 시련에 처하게 할 합당한 능력을 가진 악역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런 밤을 가장 많이 방해한 라헬이라는 캐릭터가 작중 캐릭터 중 가장 현실적이고 부족하며, 무한경쟁사회에 놓인, 그런 현실에 피로감에 찌든 독자들과 가장 닮은 캐릭터인 것이다. 그런 라헬이라는 캐릭터를, 세계관 속 계획을 위해 소위 ‘가진 자들’이 한없이 하찮게 보이는 캐릭터를 앞잡이로 내세워 작품의 가짜 악역으로 내세우는 모습은, 꽤나 불쾌한 구도다. ‘탑’이라는 시스템 자체에 부합하지 못하는 낙오된, 어쩌면 시스템 그 자체의 희생양을 대변할 존재가, 그 ‘탑’의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할 존재를 방해하는 구도라니, 당연하게도 독자 입장에서 한없이 걸리적거리는 존재처럼 보이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신의 탑>의 캐릭터 디자이너 타니노 미호가 그린 라헬



  그렇게 아이러니한 역할을 부여당한 라헬은 어쩌면 <신의 탑> 속 ‘탑’이라는 장치의 문제를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이 되기도 하고, 밤의 이상을 끊임없이 방해하며 고민하게 만들고 끝내 정신적인 성장을 이루도록 돕는 그런 인물이 되기도 한다. 다른 <신의 탑> 속 악역들이 밤의 전투적인 능력을 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라헬은 독자들이 그런 밤의 고난과 역경의 여정을 함께하면서도 밤이 강해져야만 하도록 만드는 탑의 시스템을 당연시하지 못하도록 끌어내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라헬은 독자들에게 <신의 탑>의 갈등 구도를 현실적인 갈등으로 끌어내리며, 작품의 서사를 단순히 밤이 강해지고 위기를 이겨내며 끝내 최강자로 올라가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측면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드는, 어쩌면 <신의 탑> 속 제일 중요한 역할 중 하나를 맡은 캐릭터라고 봐야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면에서 라헬은 “밤과 함께 탑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본인의 해석이 라헬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동안의 라헬을 돌아보며 그녀의 사정을 좀 더 고민하고 작품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단순한 ‘악녀’로서의 라헬이 아닌, 작품의 서사를 복잡하고 흥미롭게 만드는 인물로서 바라보고, 이를 통해 <신의 탑>이라는 작품을 더 심층적으로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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