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마녀
*본 글은 애니메이션 전문 웹진 <아니나>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anination.net/Content?cd=view&ContentCode=282&CategoryCode=1&SortCode=2)
※ 본 글에는「마녀의 여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녀의 여행]은 2020년 공개된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가장 캐릭터가 확고하게 잡히고 이것이 확장되어 소비된 케이스로 손꼽을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여행자인 주인공 마녀 일레이나가 방문한 각지의 여러 인물들과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마녀의 여행]은 전형적인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한다.
다양한 인물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주인공인 일레이나의 캐릭터는 물론, 서브 캐릭터인 사야, 프랑, 더 나아가 각 회차 속 단역들까지 여러 캐릭터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동력이 인상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근래의 애니메이션계의 흥행은 이야기의 힘보다는 캐릭터의 힘에 기대는 경향이 짙었던 만큼, [마녀의 여행]에 쏟아진 관심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에 앞서, [마녀의 여행]의 표면적인 완성도 자체가 꽤나 괜찮았던 점은 이 작품의 복잡미묘함을 몰라도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볼 수 있도록 이끈 1등 공신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대다수의 라노벨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들이 원작의 홍보 목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대부분인 요즘, [마녀의 여행] 속 (특히나 지중해 풍이 두드러지는)판타지 세계의 묘사는 해당 애니메이션이 어느 정도 정성 들여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좋은 첫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일레이나의 캐릭터는 근래의 수많은 먼치킨적인 잘난 캐릭터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독보적으로 나르시즘이 두드러지는 유별난 캐릭터다. 일레이나를 설명하는 수식어를 보면, 나르시스트, 이기적, 기회주의자, 수전노 등등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 투성이다. 그러나 [마녀의 여행] 속 일레이나는 그러한 수식어 대비 딱히 부정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수식어는 일레이나의 현실주의적 속성을 완성시키는 것에 가깝다.
[마녀의 여행]의 여행은 가볍고 안일한 꿈과 환상이 가득한 판타지의 그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오히려 일레이나의 여행길에 거쳐간 수많은 상황들은 지금 현실 속 문제들과 맞닿아 있는 것이 많다. 특히나 [마녀의 여행]의 에피소드 속 폭력의 형태는 주로 여성 대상 가부장적 폭력의 양상에 가깝다(3화, 4화, 9화).
[마녀의 여행] 세계관 속 마녀의 능력이 가히 최강자에 가까운 그것이라 한들, 마녀 개개인의 경험 여부에 따른 상황판단 능력의 차이와 낯선 환경에 놓인 이방인의 속성을 고려했을 때 현실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일레이나의 특성은 그녀의 생존을 위해 필수에 가깝다.
실제로도 작중 일레이나는 그녀의 능력과 마녀로서 권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끊임없이 성적인 시선에 노출되고 대상화 된 적이 훨씬 많았으니 말이다.(음울한 회차 뿐 아니라 밝은 분위기의 ‘포도 밟는 소녀’ 편 등에서도 꾸준히 묘사된다.)
여성이 홀로 경제적인 지원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긴 여행을 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마녀의 여행] 속 판타지 세계관보다도 더 비현실적인 판타지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마녀의 먼치킨적인 능력 설정과 일레이나 스스로의 강한 자아, 그리고 수전노 특성, 더 나아가 일레이나의 연애 플래그가 전부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까지 [마녀의 여행] 속 모든 요소들은 작품의 전제인 ‘일레이나의 여행’이 유지되기 위해 필수적인 장치인 것이다.
인생은 큰 의미에서 여행과도 같다는 표현이 한 때 널리 퍼졌던 적을 기억한다. 사람들이 여러 로드무비들을 접하거나, 혹은 직접 여행에 나서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러한 행동의 가장 큰 이유는 전에 보지 못한, 익숙하지 않은 장소, 환경,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의 경험이 가장 클 것이다. 또한 생소한 환경 속에 던져진 이방인의 입장에서 여행자인 스스로를 좀 더 큰 관점에서 관찰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러한 ‘여행’이라는 행위의 의의에 대해 고찰해볼 때, [마녀의 여행]은 ‘여행’에 정말 충실한 작품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과 두려움, 준비, 시행착오부터 시작해, 각 지역만의 특수한 상황에 던져진 일레이나의 경험(모험)담, 여행 답게 여러 풍경을 담아낸 미술과 식도락을 즐기는 일레이나의 모습, 그리고 여러 경험들 뒤에 일레이나 본인의 여러 면모를 고찰하는 것까지 시청자들은 여행이 ‘일레이나’라는 캐릭터에게 주는 수많은 (꽝이 포함된)선물들을 함께 개봉할 기회를 얻는다.
‘흘러가듯이 마음 내키는 대로 긴 여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광대한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나,
누군가의 아름다운 일상을 접하면서,
그녀는 여행자로서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다양한 나라와 사람과의 만남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 [마녀의 여행] 공식 시놉시스 中
[마녀의 여행]의 공식 시놉시스에 적힌 대로, 판타지적 설정 위에 현실적인 인간 군상들이 등장하고, 때론 밝고 때론 어두운 면이 공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녀의 여행]을 단순한 예쁜 마법소녀의 빛깔 좋은 판타지 세계관 탐방이 아닌 훨씬 풍부한 이야기로 만들어준다.
일레이나가 인생이라는 여정의 일부를 또다른 여행들로 채워 나가며,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모습은 우리가 여행이라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혹은, [마녀의 여행] 속 판타지적 설정으로 덧씌워진 지금 현실의 여러 군상을 떠올리고 그 현장에 놓인 일레이나에 이입하고, 이방인이며 동시에 내부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행동을 취할지 고민해 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건, [마녀의 여행]은 때론 불편하고, 때론 현실적이며, 적당히 낭만적인, 읽어볼 가치가 있는 여행기가 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마녀의 여행]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