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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나무 Sep 07. 2024

나 이제 괜찮아, 이제 떠날 수 있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하고도 100일이 지난 무렵,      

동생네랑 같이 산소를 다녀온 후인가, 꿈을 꿨다.

그즈음에 꿈에 잘 나오지 않아서, 이제 나오기가 힘든 건가 내심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여전히 다정하지만, 안다, 그 뉘앙스. 이미 결정했다는 단호함이 묻어있는 어투.       

“자기야, 나 이제 괜찮아. 그동안 준비 많이 했거든. 이제 떠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이상하다 하겠지만, 나는 마치 그와 약속한 것 같았다. 우리, 3년은 더 같이 있자고.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헤어져도 괜찮을 거라고. 6개월 정도는 정말 옆에 있는 것 같았고, 그 뒤로는 조금씩 희미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가 1년 100일째가 되자 준비가 되었다고 하니, 꿈에서 깨서는 내가 얼마나 잘 사는지 보여주겠다고 100일간은 술도 안 마시고 밥도 잘 챙겨 먹겠다고, 그래서 마음 편하게 훌훌 떠나게 해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웬걸, 말이 그렇지 그간 술의 힘을 빌려 시간도 외로움도 채우고 종종 잠도 재촉했던지라 술을 안 마시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다. 몸에 아주 낮은 미열이 계속 나는 거다. 처음엔 몸살에서 시작했는데, 몸살이 끝나도 열이 내려오지 않았다. 그것도 엄청 높은 미열도 아니고 겨우 37.5도 내외. 어떤 사람들에겐 열도 아닐 테지만, 원체 체온이 35.5도 정도다 보니 2도 정도 높은 열도 꽤 부담스러웠다. 열이 나나보다 할 수 없었던 것이 너무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살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데 이렇게 피곤한 적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1시간 정도 운전하고 나면 집에서 반나절은 쉬어야 해서, 모든 약속을 다 줄였다. 그러다 조금만 일하면 또 몸살이 났다. 한 번씩 마음이 너무 격렬하게 서글퍼져서 술을 마시려고 시도한 적 있는데, 열이 너무 올라서 포기했다. 이리저리 탐문해 본 결과, 지금으로 봐서 가장 적절한 의견은 ‘50대 중반이면 한번 꺾어지고, 60대 중반이면 또 한 번 꺾어지지요’인 것 같다. 7주 정도 계속되는 동안 주변의 조언에 따라 여기저기 검사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이제 그도 없으니, 독거중년의 몸은 혼자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가 떠나기 전에 술 좀 줄이라고 이렇게 만들어주는 건가?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안다. 뭐 어떤가, 생과 사의 경계 너머로 헤어진 처지에 어디부터 어디가 말이 되고 안 되고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 덕분에 금주의 시간이 잘 흘렀다. 이제는 체온이 높은 상태에 몸이 대충 적응한 것 같다. 체질이 변한 건지도.       


그리고, 제주를 갔다. 아버지의 산소가 제주에 있다 보니 우리는 제주를 꽤 자주 가는 편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공항에서, 혼자 버스를 타러 가는데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 제주만 오면 이래, 거참. 이번엔 후배네 집에 있으라고 해서 그곳으로 갔다. 최근에 해녀학교를 수료한 그녀는 새로운 체험을 시켜주겠다며 스킨스쿠버 장비를 챙겨 근처 바다로 인도했다. 그가 꼭 한번 같이 해보자고 했던 건데. 결국 혼자 후배랑 하게 되었다. 꽤나 재미있고 흥미로워서 기분이 묘했다. 어라, 자기가 없어도 꽤 재미있는데? 자기 대신 내가 해봐 줄게. 물이 뭐 이렇게 짜! 작은 물고기 떼들이 지나가는 것이 신비로웠다. 이상했다. 여전히 열이 있는데도 술도 괜찮았고, 심지어 그가 떠난 후 비려서 못 먹겠다고 생각했던 회도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 산소에서 술잔에 따른 술은 바람이 작은 물결을 만들어주었다. 무언가 기분이 상당히 좋으신 것처럼 산들산들 흔들렸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마님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두 남자’ 중 한 분이시다. 아빠, 잘 계시죠? 좋은 술친구가 있어서 좋으시겠어요. 자기, 아빠랑 재밌게 지내고 있지? 둘 다 외로운 사람들이었으니, 이제 더는 외롭지 말기를.      


다음날 행원 바닷가에 갔을 때, 돌고래 몇 마리가 꽤 가까이 접근을 했다. 와, 돌고래야! 이렇게 가까이서는 처음 봐 이러면서 감탄하는데 갑자기 그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자기는 왜 내가 불행할 거라고 생각해? 나는 이제 내가 원할 때는 이처럼 돌고래도 볼 수 있고, 원하는 어떤 곳이라도 갈 수 있어. 난 괜찮아, 행복해. 자기만 행복해지면 돼.’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어라, 내가, 내가 없으면 그가 불행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그가 없어서 내가 불행한 것처럼? 아니, 나는 불행하지 않아. 자기와 함께 있던 것처럼 행복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진 않아. 자기도, 나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행복하진 않겠지만, 무언가 새로운 경험을 하며 신기해하고 재밌어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믿으려고 노력해 봐야지.       


그런 마음으로 제주에서 돌아왔다. 돌아온 다음날은 자기가 떠난 지 1년 하고도 200일째,

자기가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 지 100일째,

그리고 자기의 생일. 불변의 55세 생일,

생일축하해. 이제 내가 1살 많아졌네.

내가 좀 더 현명해져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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