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진실
볼 때도 그렇지만 보고 난 후 떠올릴수록 재미있고 의미도 깊다. '버드맨(Birdman)'이란 마이클 키튼이 연기한 주인공 리건 톰슨이 젊은 시절 헐리우드 영화에서 맡았던 히어로 캐릭터의 이름. 마이클 키튼은 실제로 1990년대 '배트맨'의 주인공이다.
시그니처 포스터에서, 철 지난 캐릭터를 머리에 얹은 배우의 표정이 비장하다. 리건 톰슨과 버드맨, 아니 마이클 키튼과 배트맨의 존재가 섞인다. 60세가 넘은 영화의 주인공은 여전히 건재한 조지 클루니와 달리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왕년에 자신이 쓰고 있던 히어로 가면은 정말 가면이었을까?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 걸까?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관심 가지지 않는 할리우드를 자의 없이 타의로 떠났지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다. 그래서 자기 자본으로 브로드웨이에 자리를 잡았다. 한마디로 할리우드에서 이미지로 성공하여 배우로서 연기를 인정받기 전에 떠나야 했던 배우. 그가 미국 사회에서 가장 할리우드에 비판적이고 예술에 진지한 브로드웨이 무대에 할리우드에서 번 자본으로 진을 치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 '몸부림'치는 모습이 웃프며, 그것이 <버드맨>의 취지다.
극작가 레이놀드 카버는 어린 시절 리건에게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준 인물이다. 리건은 자신의 재기작으로 레이놀드 카버를 택했다. 그 작품을 스스로 각색하고 주연을 맡았다. 자본도 바닥 난 상태에서 비어 있는 주요 배역을 이미 브로드웨이에서 존재감이 무거운 마이크 샤이너가 채우게 된다. 까다로운 브로드웨이 비평가들에게 사랑받을 정도로 연기파인 동시에 자기중심적이고 제멋대로이기도 유명한 마이크 샤이너는 작품의 흥행을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다. 반면 그는 이 새롭고도 척박한 바닥에서 연기력으로 존재감을 알리려는 주인공 리건에게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오디션을 보러 온 마이크는 아직 리건에게 정중하게 말을 아끼는 눈치지만, 기선을 놓치지 않는다. 마이크가 이미 대사를 외우고 있고 심지어 상대역의 대사까지 외우고 있다는 사실에 리건은 집착하지만, 그에 그치지 않는다. 마이크는 작품을 이미 통째로 이해하고 오히려 상대방을 좌지우지하며 리건이 쓴 대사를 지적한다. 첫 만남에서 리건은 열등감을 느끼지만, 반대로 그런 그와 호흡을 맞추고 싶다는 열정이 앞선다. 리건은 이 두 가지 감정과 강렬하게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이크의 치기 앞에서 리건은 여러 번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무너진다. 마이크는 대본에서 소품, 상대방의 연기까지 물고 늘어지며 무대 뒤를 훼집고 다니지만 모든 스탭이 아연실색한다 하더라도 무대 위 진실을 위함이며, 이를 위해 현실에서의 자신에 대한 인간적 평판을 하찮게 생각하는 그의 명분을 이길 도리가 없다. 배우란 현실을 희생시킬수록 무대 위 현실은 진실이 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진실[real]을 사랑하는 마이크는 무대 위에서 진짜 진을 마신다. 술 취한 마이크는 리건에게 퍼붓는다. "당신은 원작을 난도질했고, 좋은 부분은 본인이 다 가지고 갔으니, 이 무대는 가짜."라는 마이크.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는 관객들에게도 "스크린 속 화면만 들여보지 말고 실제로 경험하라."고 충고한다. 그가 말한 '스크린 속 화면'을 통해 배우의 진실된 연기를 상업화한 영화 예술에 대한 비난이다. 무대 위에서 진짜 술을 마신 것은 나름대로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글을 쓰지 못했다는 원작자에 대한, 리건의 각색으로 진실이 헝클어져 버린 무대에 대한 죄책감의 표현, 혹은 헌정과 같은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마이크가 무대 위의 진실을 무대 아래의 현실로 끌고 내려오는 사람인 반면, 리건은 자신의 왕년 자존심을 대본에서부터 부여했다. 무대를 내려와서도 술이 덜 깬 듯 쥐중진담을 이어가는 마이크. 무대 위의 진실을 주제로 하는 대화에서 언쟁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이 장면에서 마이크는 할리우드를 예술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브로드웨이의 입장을 본격적으로 대변하며, 자신의 유명세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제대로 감당은 하지 못하고 있는 리건을 일축한다. 이 부분의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는 격렬하지만 섬세하다. 상업이 판치는 할리우드를 브로드웨이 비슷한 진실로 만들고자 했던 젊은 날의 실제의 에드워드 노튼과 오버랩되는 견해들이 쏟아진다. 그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많은 배역을 놓쳤다지만, 젊은 날 겪었을 이 배우의 갈등은 헛되지 않은 듯하다. 프리뷰 무대에서 내려온 지 꽤 시간이 지나서야 마이크는 서서히 술이 깨는데, 그러면서 무대 위 자아에서 배우로서의 자아로 아주 천천히 돌아오는 모습까지 에드워드 노튼답게 입체적으로 소화한다.
두 사람의 치졸한 싸움이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오만한 자존감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무대 위 진실에 집착하여 다른 배우의 자존감까지 발가벗기는 위기에 몰아넣는 마이크. 그의 집착에 리건의 도전은 바로, 현실의 도전. 유치한 대사가 오고가는 가운데, 배우가 어느 선에서 진실과 현실을 구분짓거나 타협하거나 포기해야 하는지 심오한 깨달음을 준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연출 포인트다.
이 가운데 마약으로 재활시설에 갔다왔다는 샘의 존재는 두 사람에게 깨달은 존재다. 그는 아버지가 이제 잊혀진 배우라는 점을 들며 그를 각성시킨다. 기억을 현실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노력을 역설하고, 아버지가 모르는 SNS 공간을 소개하기도 한다. 마이크가 던지는 비수와 같은 말과 행동, 샘의 충고는 리건을 오히려 조금씩 일어서게 한다. 자기보다 젊은 배우는 그에게 연극이라는 예술 그 자체에 충실하라고, 자신의 딸은 세월에 맞서 현실의 자신을 직면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마이크에게도 샘과의 대화는 또하나의 진실의 통로가 된다. “나는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인 척하지 않아. 다른 어떤 곳에서나 다른 사람인 척하지만, 무대 위에서는 안 그래.” 무대 밖 현실에서 처음으로 '진실'이 되는 순간. 샘 앞에서다.
배우는 무대 위의 삶과 무대 아래의 삶, 영화배우라면 스크린 안과 밖의 삶을 각각 살아내야 하는 직업이다. 무대 위의 삶이 완벽하지 않은 리건은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세상을 마음껏 던지고 때리고 부수며 하늘까지 나는 또하나의 완벽한 자아와 대화한다. 반면 현실의 사람들 앞에서 왜곡된 자아만을 드러내는 마이크는 무대에 올라서야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와 함께 완벽한 자신이 되는 사람이다. 리건과 마이크의 대조적 캐릭터를 중심으로 그 두 개의 삶은 자연스럽게 화합을 이룬다. 동시에 그들의 작품도 성공을 향한다.
영화는 두 사람의 대조적 캐릭터의 완전하게 구분된 공간을 카메라 워크를 통해 관통시켰다. 영화 <버드맨(Birdman)>은 무대 뒤 공간과 무대 위 공간을 구분짓지 않고 연결시킴으로써 배우들이 사는 삶의 시공간을 기호화했다. 온전히 드럼 비트만으로 구성한 OST는 어쨌든 여전히 건재한 두 배우의, 고조되거나 누그러지거나 하는 복잡한 감정선에 관객을 동기화시킨다.
마침내 뉴욕 거리 한복판에서 발가벗겨진 버드맨. 적어도 버드맨 수트를 비롯한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리건 톰슨의 모습을 시민과 팬들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극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가 마이크 샤이너가 지적한 대로 '장난감 소총'을 대신해 든 진짜 총은 주인공 머리 위의 버드맨을 날려 버린 걸까.
리건은 기브스의 뚫린 구멍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바라보며 대화한다. 이는 그가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서 자신이 각색해 올린 주인공 자신의 모습이다. '버드맨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그를 괴롭히던 물음은 이제 답을 찾은 것 같다. 아마도 그는 하늘로 날아오른 것 같다.
배우로서,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건 이 배우의 시도는 성공했다. 많은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고 평단에서도 좋은 평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실제 영화도 그랬다. <버드맨>은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촬영상, 감독상을 받았다. 음향과 남우 주조연까지 모두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삶은 모른다. 한번의 실패가 삶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듯, 한번의 성공이 삶의 성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