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티플 시그니처>, 마이클 록
마사지 삼인조가 읽었던 글 중 구미가 당긴 단락을 공유합니다.
역시 정수는 요약이 아닌 원본에 있습니다. 저희는 그저 사견이라는 이름의 양념을 칠 뿐입니다.
1.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베다경이나 복음서 등 초기 경전에는 작가가 없었다. 지은 이들은 고대사에 묻혀 사라졌다. 경전에 작가가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작가 이름은 상징적 수단이지 개인에게 귀속되는 권위가 아니다.
2. 예컨대 <누가복음>은 다양한 글을 ‘루가’라는 이름으로 엮은 경전이다. 루가는 실존 인물일 수도 있고 일부는 직접 썼는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완성작으로 여기는 글 전체를 쓰지는 않았다.
3. 당시까지 과학은 객관적 진실은커녕 주관적 발명과 과학자의 권위에 기댔다. 그런데 과학적 방법이 등장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과학적 발견이나 수학 증명은 저작된 관념이 아니라 발견된 진실로 여겨졌고, 따라서 작가도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예컨대 천문학자가 새 별을 발견하면 자기 이름을 붙이기는 해도, 그 별을 자신이 빚어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사실’은 보편적이고, 그러므로 영원히 변하지 않은 채로 이미 존재한다.
4. 18세기에 이르러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문학은 저작물이 되었고, 과학은 익명으로 생산되는 객관적 산물이 되었다. 작가가 (불온한 저작물을 써냈다고) 처벌받게 되면서 작가와 텍스트는 단단히 연결되었다.
5. 여러 이론가가 일제히 주장하는 것처럼 오늘날 디자이너가 열린 독해와 자유로운 텍스트 해석을 지향한다면, 이 욕망은 작가주의와 상충한다. 작가 숭배는 해석을 좁히고 작가를 작품의 중심에 놓는다. 푸코는 작가라는 존재가 특별히 해방에 이롭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6. 텍스트에 관한 권위를 작가에게 되돌리고 목소리에 초점을 맞추면, 작가의 현존은 작품을 가두고 분류하는 제한적 요인이 된다. 텍스트의 기원이자 궁극적 소유주로서 작가는 독자의 자유 의지에 맞선다. 작가는 창작자를 천재로 여기는 전통적 관념을 재확인해주고, 작가의 명성과 권위는 작품을 조건 짓는 한편 거기에 어떤 신화적 가치를 불어넣는다.
마이클 록, <멀티플 시그니처>, 안그라픽스(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