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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Jan 19. 2023

잃어버리지 않기

잊어버리는 날:사라 룬드베리 글그림:어린이 작가정신:2022

‘잊다’는 기억해야 할 일이나 생각이 지워졌을 때 쓰는 말이에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반면 ‘잃다’는 물건 등이 없어졌을 때 써요. 가지고 있던 마음이나 성질이 없어졌을 때도 ‘잃다’를 쓰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숙제를 잃어버린 건가, 잊어버린 건가 


사라 룬드베리의 그림은 큰 액자에 걸어두면 좋을 것 같은, 우리가 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붓터치의 그림책이다. 사라 룬드베리의 그림은 '여름의 잠수'로 처음 만났다. 그리고 2022년 신작 '잊어버리다'를 만났다. '여름의 잠수'는 사라 룬드베리가 그림만 그렸지만 이 책은 글그림 모두 사라 룬드베리의 작품이다. '여름의 잠수'표지처럼 이 책의 표지도 인물이 등장하는데도 우리 집에 액자로  걸어놓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렇지만  두 그림책을 나란히 놓고 보면 느낌이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여름의 잠수는 시원하고 다정하고 아름답다. 머리를 맞대고 있는 두 사람의 입꼬리는 살며시 올라가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의 책 옆에 있는 잊어버리는 날은 어둡고 복잡하다. 색감이 어둡고 주변에 사람이 많다. 출퇴근길 도심 한복판에서 엄마와 아이들 주인공으로 하여 찍은 사진 같은 느낌이 든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엄마가 무언가 말을 하듯 입을 벌리고 있다. '잊어버리는 날'이 제목인 데다 이런 그림을 보고 있으니 무언가 긴박하고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책의 이야기는 엄마가 노아의 반친구 알마의 생일을 '잊어버렸다'가 토요일 아침에 생각이 나면서 시작된다. 엄마는 노아를 깨우고 친구의 생일파티를 가기 위해 준비한다. 엄마는 부엌에서 정신없는데 노아의 표정은 시큰둥하다.


아마 반 아이들 모두 알마의 생일 파티에 가겠지만, 노아는 가고 싶지 않아요. 알마랑 논 적도 없고요.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덜컹한다. 엄마는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고, 노아는 왜 반 아이들 전체가 가는 생일파티를 가고 싶지 않은 거지라는 걱정이 시작된다. 어쩐지  고난의 하루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엄마는 서두르지만 노아는 어쩐지 미적거리는 것 같다.


생일파티에 가기 전에 엄마는 부랴부랴 시내의 가게에 들러 알마의 선물을 쇼핑한다. 생일파티에 가는 아이는 노아인데 엄마만 분주하고 노아는 여전히 딴짓 중이다. 노아는 옷 가게가 더워 재킷을 벗어놓는다. 그리고 벗어둔 걸 '잊어버리고' 엄마와 가게를 나온다. 가게 밖에서야 엄마와 노아는 재킷을 '잊어버린'걸 기억하고 다시 가게로 가서 재킷을 찾는다. 다음은 장난감 가게이다. 노아는 여전히 딴짓 중이고 엄마 혼자 열심히다. 그러다 엄마는 노아가 가지고 노는 왕관이 괜찮아 보여 그걸 선물로 결정한다.


이제 생일파티만 가면 된다. 버스에 올라탔는데... 노아가 가장 좋아하는 모자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와 노아는 버스에서 내려 다시 장난감 가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잊어버린' 모자를 찾는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알마의 집에 도착했는데 알마에게 줄 생일 선물을 잊어버린 걸 알게 된다. 엄마는 화가 많이 났지만 꾹 참는다. 그런데... 오늘은 알마의 생일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알마의 생일은 다음 주란다.


알마의 아빠가 웃으며 알려준 충격적인 이야기를 뒤로하고 노아와 엄마, 알마와 알마의 아빠는 차를 한잔 마신다. 마침 알마네는 차를 마시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이제 노아와 엄마는 집으로 돌아가서 하루를 돌아보며 내일은 푹 쉬자고 말하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처음 그림을 보았을 때의 느낌과는 다르게 이야기는 따뜻하고 즐겁게 이어진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표정이 없고 어두운 색이 그림 전반에 퍼져있어 어쩌면 슬픈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했는데 글과 그림이 어우러지면서 어쩐지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능청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밤에는 노아와 엄마가 잊어버린 알마의 생일 선물 왕관이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만화처럼 칸을 나누어 전개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사도 없고 표정도 없지만 흘러가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아이는 이 이야기를 5번이나 읽었다. 그냥 읽고 소리 내어 읽고, 혼자 방에서 조용히 또 읽으며 재미있다고 말했다.


나는 물론 노아의 엄마를 보며 나를 떠올렸다. 노아의 엄마는 시종일관 안경을 머리 위에 올려서 다닌다. 아마도 노안이 온 것 같다. 길에서는 안경을 주로 머리 위에 올리고 있다가 상품 설명을 볼 때는 내려서 안경을 쓰고 꼼꼼히 읽는다. 아침에 일어나 이번주 토요일이 생일인 줄 알고 정신없이 준비했다가 아니었다는 소식에 어깨가 쭉 내려간 뒷모습도 나에게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다. 달력에 적어 두어도 일정을 헷갈리거나 잊어버리기 일쑤이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어쩌다 생긴 잘 모르는 가족과의 티타임도 능숙하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도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아이가 혼자 놀아도 너무 피곤해서 소파에서 졸기 일쑤이다. 어젯밤에도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이 노는 동안 나는 혼자 잠들어 버렸다.


아이는 노아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종종 잊어버리는 자신의 물건이 노아가 잊어버린 왕관처럼 어딘가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행복해지지 않았을까?


그림책을 보며 잃어버리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잊어버린다. 약속도 물건도 그림책 속의 엄마와 아들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노아도 엄마도 서로의 잊어버린 것들에 대해 질책하지 않는다. 노아의 엄마는 한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잘 참아낸다. 노아는 이해심이 무척 큰 아이다. 어쩌면 노아의 엄마는 늦은 나이에 노아를 만났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나이에 비해 엄마의 나이가 많아 보인다. (노안이 온 것도 그렇고, 입가의 주름도) 노아의 엄마는 노아가 친구의 생일 파티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사실 노아는 알마와 친하지 않다.  그렇지만 노아는 그걸 잊어버렸거나 잘 모르는 엄마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알마의 집에 일주일 일찍 생일 파티를 간 일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건 아마도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신뢰와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아서가 아닐까? 처음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잊어버린다는 말 자체에 마음이 쓰였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난 뒤에는 잊어버리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생각하게 된다.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겠지만, 어쩌다 잊어버린 것에 대해 나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어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내가 무언가를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잘 챙겼던 시절은 내 인생에서 딱 15년 정도였다. 그러니까 사춘기가 막 끝나가던 17살 무렵부터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 인생에서 제일 빠릿빠릿했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이전에는 물건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고, 이후에는 일을 자꾸 잊어버린다. 딱 '잊어버리는 날'의 노아와 노아 엄마와 같은 모습이었다. 요즘은 잊어버려서 메모도 해보고 주변의 도움도 받는다. 그럼에도 잊어버려 수습하기 위해 식은땀을 흘리며 동분서주할 때가 많다.


  '잊어버리는 날'을 세 번째 보며... '나 좀 괜찮은데 잊어버린 것은 많아도, 잃어버린 것은 없잖아.. 그리고 이 책을 읽었더니 잊어버림에 대해 더 관대해지는 걸.. 앞으로는 더욱더 잃어버리는 것은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잊어버리는 날'은 잃어버린 또는 잃어버릴 뻔한 어떤 마음을 찾아주는 그림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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