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윤동주 시; 이성표 그림;보림;2016)
채도가 다른 초록빛이던 나뭇잎의 색이 빨간색, 노란색으로 물이 들고 하늘이 파랗게 물감을 풀어놓은 듯해지면 저절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하얀 바탕에 파란 얼굴의 까까머리 아이의 머리에 옅은 빨간색의 나뭇잎이 한 장 올려져 있는 그림책의 표지. 나뭇잎을 올린 파란 소년의 표정은 마치 모나리자의 미소를 보는 듯하다.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데도 어떤지 눈빛은 슬퍼 보이고, 농담이 다른 파란색으로 표현된 얼굴과 몸은 쓸쓸함을 자아낸다. 여기에 살며시 올려진 입꼬리는 순수한 애정을 담은 작은 희망을 보여준다.
윤동주 시인의 시 ‘소년’은 이성표 작가에 의해 그림책으로 만들어졌다. 사람의 감정에 따라 달리 보이는 표지에 그려진 소년의 모습 옆으로 ‘소년’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제목의 글자는 연필로 무심히 써 내려간 듯 보인다. 정제되지 않은 듯한 두 글자는 우리의 머릿속에 흔히 간직한 소설 소나기에 등장하는 어설프고 열정적이지만 아직 무엇도 할 수 없는 그 시절의 소년처럼 보인다.
소년(少年)
윤동주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골ㅡ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골이 어린다.
소년(少年)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골ㅡ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골은 어린다. 1939년
윤동주 시인은 살아생전 두 번의 짝사랑만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에는 ‘순이’가 종종 등장하는데 ‘순이’는 그가 연희전문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4년간 짝사랑했던 여성을 표현한다고 한다. 짝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마음으로 들썩이는 마음이 사람에게 가 닿지 못하고 아름다운 시로 남았다. 가수 10cm도 말하지 않았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알콩달콩한 커플들에게…. ‘봄이 그렇게도 좋냐?’라고. 그러니 짝사랑하는 소년의 마음에는 가을이 어울린다. 이 가을이 지나고 나면 봄이 온다는 희망도 있지 않은가. 그래도 마음에는 끊임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고 어쩌면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있다.
여기저기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책을 펼치면 다시 하얀 바탕에 농도를 달리하는 파란색이 보인다. 제목 ‘소년’을 읽고 다음 페이지를 펼치면 시의 첫 문장과 그 아래로 같은 소년이 여러 명 등장한다. 소년은 놀란 표정이기도 하고 하늘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때로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에 붙어버린 단풍잎을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를 보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 아래를 골몰히 내려다보며 생각하는 모양새도 보인다.
가을은 모든 것이 끝나가는 계절이자, 최고로 풍성한 계절이며, 다시 찾아올 시작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높고 파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있고, 빨간 단풍잎은 완전히 빨갛지만은 않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다. 마음을 보여주는 표정은 말할 것도 없다. 각자의 다른 사람들 속에 사는 단 하나의 내 안에도 농담이 다른 여러 가지 빛깔들이 존재한다. 그림책 ‘소년’은 그런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한다.
2년 전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는 이런 마음은 아니었다. 소년의 순진한 미소와 윤동주 시인의 시에 흐르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마음을 울렸다. 후드득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을 보고 있으면 잊지도 않은 그리운 사람이 내 손금에 흐르는 강물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 내 얼굴은 아마도 표지의 소년 같은 표정이었을 거다.
이제 다시 책을 펼치니 소년의 다양한 표정이 보인다. 마냥 파란 하늘보다는 드문드문 모양과 깊이가 다른 흰 구름이 보인다. 이제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무에 보이는 저물어가는 초록의 색과 색을 바꿀 준비를 하는 나뭇잎, 물이 들기도 전에 병이 들어 검은 점이 보이는 나뭇잎이 보인다. 그리고 그 나뭇잎들을 달고 있는 나무의 줄기가 보인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가을이 그렇게 오고 있다. 이번 가을에 나는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