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수지: 비룡소:2015)
2021년에 1판 2쇄를 펴낸 이수지 작가의 2015년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첫 장에는 '이 책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2015년에서 무려 6년 만에 2쇄가 발행되었다. 이수지 작가는 2022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받으면서 새롭게 조명되었다. 그 전에도 인지도가 있었지만 이 상을 받으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작가이다. 이전에 '파도야 놀자'같은 책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이야기로 써 내려가긴 어려운 책이었다.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은 글이 없기 때문에 글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지만.... 뭐랄까? 한 편의 소설이라기보다는 시에 가깝다.
장면 장면이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장면마다 사람의 마음을 짜르르 울리게 하는 무엇이 있지만.. 나 같은 평범한 독자가 누군가에게 뭐라고 문장으로 설명해 내기는 어려웠다. 그냥 보고 좋아할 뿐이었다.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낯설었다.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으로 유명한 책은 주로 밝은 이미지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 책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유명한 이야기의 제목을 딴 그림책은 그 이야기를 축소하여 어린이에 맞게 그림과 함께 배치한다. 이수지 작가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당연히 그런 그림책이라 미루어 짐작했다. 그러나 이 그림책은 제목과 시작만 같을 뿐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작가는 루이스 캐럴의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 'Is all our life, then, but a dream?'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그림책을 다 읽고, 마치 타자기로 찍어낸 듯한 이 문장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진짜 꿈속에 들어갔다 온 듯한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이수지 작가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책은 영국 테이트 모던의 아티스트 북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모던이라는 말에 잘 어울리는 책이다. 그래서 테이트 모던에 소장되어 있음 또한 잘 어울린다. 이야기는 손가락에서 시작되어 사진과 명화,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어우러져 기묘한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책의 표지에는 오랜 극장 같은 곳에 'Alice in Wonderland'라고 적혀 있다. 그 아래도 엄지 손가락이 살짝 보인다.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표지에 엄지손가락이 있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그러나 책을 다 보고 표지를 덮으면 명확하게 손가락 하나가 보인다.
책의 표지에서 시작된 공연장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막이 열리면 의자에 아이가 앉아있다. 아이는 토끼를 따라간다. 토끼 몰래 토끼를 뒤쫓고 있다고 생각한 아이에게 별안간 토끼가 뒤를 돈다. 아이는 놀란다. 장면이 바뀌어 토끼의 탈을 쓴 소녀가 무대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다. 이야기는 끝이 나고 사람들은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런데 그 무대가 벽난로 같아 보인다. 그리고 커다란 사람이 벽난로 주변에 청소기를 돌리고 있다. 그러자 벽난로 같아 보이는 무대의 토끼탈을 쓴 사람도 청소기를 돌린다. 그리고 다음장을 넘기면 손가락이 등장한다. 내가 지금까지 본 건 모두 책 속의 이야기라는 듯이. 그리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사람도 사람이 이야기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책의 마지막을 넘기는 손가락 위로 루이스 캐럴의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문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삶은 한바탕 꿈일까?" 그리고 등장한다. 방금 내가 봤던 청소하는 사람이 무대에서 인사를 하고 그 무대를 보고 있는 토끼머리가.
액자 안에 액자가, 다시 또 액자가 등장함으로써 어디까지가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헷갈리게 한다. 거기다 연극 장면 곳곳에는 유명 그림들이 등장한다. 아이가 토끼를 보고 처음 빠져들어간 곳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채찍질당하는 그리스도'그림들 속이다. 아이가 그림들 속을 들어왔기 때문인지 넘어진 아이의 앞에는 유리가 깨져서 흩어져 있다. 다음 장면은 디에고 벨사스케스의 시녀들인데 이 그림은 그림을 그대로 쓰지 않고 팝업북처럼 만들어 시녀들 사이로 숨바꼭질 하듯 토끼와 아이가 움직이다.
이 책은 온통 흑백이다. 색도 없고 글도 없는 그림책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비틀리고, 그림은 분해된다. 언뜻 기괴하면서도 매력적이다. 우리는 종종 상상한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무언가가 우리를 보고 있지 않을까? 내가 사는 세상은 진짜 있는 세상인가? 같은 것들. 책을 읽고 나면 내가 지금 앨리스가 아닐까? 잠시 멈칫하며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장자의 '호접지몽'이나 김만중의 '구운몽'같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수지 작가는 그림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꿈같은 상상 속 이야기를 잔혹하면서도 유쾌하게 그려내었다. 작가의 '여름이 온다', '파도야 놀자', '물이 되는 꿈'같은 시원하고 하얗고 밝고, 몽글몽글한 그림책도 좋았지만 개인적이 취향은 이쪽에 가깝다. 출판된 지 6년 만에 2쇄라니 너무 아쉽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