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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Feb 20. 2023

소중한 오늘 나의 삶

내 이름은 루시바턴, 오, 윌리엄!(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우리나라에서 2017년에 발행된 '내 이름은 루시바턴'과 2022년에 발행된 '오, 윌리엄!'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글, 정연희 번역, 문학동네 출판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 책의 화자는 모두 '루시 바턴'이라는 점이다. '루시 바턴'은 늦은 나이에 작가가 된 뉴욕에 사는 여성으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썼다. 그리고 이번에는 첫 번째 남편의 이름을 딴 '오, 윌리엄!'을 쓴다.


'내 이름은 루시바턴'은 첫 번째 남편과 살 때 병원에 구주동안 입원하면서 일어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오, 윌리엄!'은 루시바턴의 두 번째 남편 데이비드가 죽고, 첫 번째 남편 윌리엄의 세 번째 부인이 집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이전책에서 아직 루시바턴의 손길을 필요로 하던 아이들은 윌리엄에서는 성인이 되어 이미 결혼까지 했다. 그리고 이전책에서 살아있던 윌리엄의 어머니 즉 루시 바턴의 시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루시 바턴은 이전책에서 작가가 되기 위한 꿈을 꾸고 수업을 들어어 다니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70이 된 그녀가 이미 성공한 작가가 되어 있다.


'내 이름은 루시바턴'은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친정어머니가 그녀를 돌보러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루시 바턴의 생각은 어린 시절과 며칠 전, 지금의 남편을 만난 이야기 등을 오가지만 그녀의 몸은 계속 열이 오르는 상태로 병원에 있다. 루시 바턴은 맹장 즉 충수염이라는 어찌 보면 간단하게 수술로 끝나는 병으로 입원했는데 박테리아 때문에 열이 내리지 않아 퇴원이 계속 미루어진다. 루시 바턴의 남편은 이런저런 핑계로 병원을 잘 오지 않고 대신 장모님께 연락을 드려 오시게 한다.


'오, 윌리엄'은 루시 바턴의 남편이 죽고 윌리엄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는 루시 바턴과 그녀의 딸들 이야기. 그리고 그날 윌리엄이 현재 부인에게 받는 선물이 시발점이 되어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나라는 족보가 있고 그 외에 무언가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미국에는 자신의 족보를 찾을 수 있는 유료 사이트가 꽤나 유행을 하고 있었나 보다. 윌리엄은 부인에게 족보사이트 이용권을 선물로 받는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누나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윌리엄이 어머니가 윌리엄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기에 확인할 방법이 없다. 윌리엄은 루시 바턴에게 자신이 새롭게 알게 된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하기를 부탁한다.


두 책의 줄거리는 대략 이런 내용이고, 페이지는 300쪽을 넘지 않는다. 짧고 간단한 소설, 특별하게 모나지도 별나지도 않은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두 개의 책이 다루는 루시 바턴의 출생과 삶의 궤적, 그로 인한 트라우마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그녀만의 노력, 그러나 끝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것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얼마 전에 크리시가 내 지금의 남편에 대해 말했다. "아저씨가 좋아요, 엄마. 하지만 아저씨가 잠을 자다 죽고 새엄마도 죽어서 엄마와 아빠가 다시 합치면 좋겠어요." 나는 아이의 정수리에 키스한 뒤 생각했다. 내가 내 아이에게 이런 짓을 했구나. 내가 내 아이들이 느끼는 상처를 아느냐고? 나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아이였을 때 품게 되는 아픔에 대해, 그 아픔이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며 너무 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갈망을 남겨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꼭 끌어안는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끌어안는다.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내 이름은 루시바턴 217


루시 바턴은 시골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방치와 학대 속에 살았다. 그 와중에 공부를 열심히 하여 대학에 가게 되었고, 이는 가족 모두를 배신하고 그곳을 벗어나는 행위였다. 그렇게 루시 바턴은 도시(뉴욕)의 일원이 되었다. 루시 바턴은 그곳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한다. 그들의 화려함과 당당함을 늘 부러워한다. 그러다 윌리엄을 만나면서 비로소 완전한 이해를 받고 외로움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고까지 느낀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아주 이상했고 말할 때의 목소리는 너무 컸던 것 같다. 대중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내가 잘 모르는 평범한 유머에는 어색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나는 반어라는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 고, 사람들은 그 사실에 어리둥절해했다. 내가 남편 윌리엄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가 정말로 내 안에 있는 뭔가를 이해한다고 느꼈다-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내 이름은 루시바턴 38


루시가 그렇게 느낀 이유는 무얼까? 윌리엄은 루시와 비슷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루시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윌리엄을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현재의 윌리엄은 루시보다 부유하고 안정적이다. 루시가 처음 윌리엄에게 애정을 느낀 부분은 이것이었겠지만 종국에는 떠나는 이유도 이것이다. 윌리엄은 나를 완전히 이해하면서도 여유가 있어서 나를 감싸주리라는 착각 말이다.


나는 윌리엄과 내가 헨젤과 그레텔, 작은 두 꼬마가 되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우리를 집으로 데려다줄 빵 부스러기를 찾는 이미지를 종종 떠올렸다.

이것이 앞서했던 말, 내가 유일하게 가져본 집이 윌리엄과 함께 살던 집이었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내 마음속에는 두 말이 모두 사실이고, 이상하게도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헨젤과 함께 있으면-우리가 숲 속에서 길을 잃더라도-안전하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인 것 같다. 오, 윌리엄! p.139


루시와 윌리엄의 어린 시절은 나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맥락이 있다. 우리 부모님이 전쟁에 나갔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지독한 가난까지는 아니라고 할 수 있고, 가정폭력이 있었나 하면 그것까지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라면서 우리가 느끼는 정서적, 물질적, 물리적 결핍은 맥락을 같이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핍을 타인에게서 메꾸고 싶어 할 때가 있다. 소속되어야 비로소 느껴지는 편안함을 느끼고, 이전의 어떤 것들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 고통스럽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지만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 바닥으로 침몰하는 경험도 한다.


그 모든 것이 데칼코마니 같은 두 책에 담겨있다.  


사람들은 외롭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아는 사람들에겐 할 수 없다.  p. 152

뉴욕으로 들어올 때마다 나는 거의 늘 같은 감정을 느꼈고, 그날도 창밖으로 뉴욕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느꼈다. 그 감정은 사방으로 뻗어 있는 이 장소가 나를 받아주었다는-나를 거기 살게 해 주었다는-사실에 대한 경외심과 고마움이었다. p. 255 오, 윌리엄


그렇게 루시 바턴이 윌리엄이 그리고 내가 불완전하고 외롭고 그래서 어떤 것들에 고마웠다가 도망가기도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줌으로써 위로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문단에 예비해 두었다. 이 글에 공감하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인지 다 안다는 듯이. 작가가 적어 놓은 이야기들을 실천하지 않더라도 이 구절들을 읽는 순간만이라도 위로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간결하고 명료한 책의 문장을 곱씹으며 다시 한번 위로받는다.


요즘 나는 가을에 우리의 작은 집을 둘러싼 농장에서 해가 지던 장면을 이따금 떠올린다. 어디를 봐도 지평선이 보여, 내가 한 바퀴 빙 돌면 지평선도 한 바퀴 원을 그렸다. 해는 등 뒤에서 지고, 눈앞에 펼쳐진 하늘은 그 아름다운 변신을 멈출 수 없다는 듯 은은한 분홍빛을 자아내다 슬며시 푸른 기운을 띤다. 이윽고 지는 해에 가장 가까운 땅이 한 줄 오렌지색 선을 그리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어두워지다 거의 컴컴해진다. 하지만 돌아서면 땅 은 여전히 부드러운 형체를 희미하게 드러내며 몇 그루 나무와 흙을 갈아엎고 간작 식물을 심은 고요한 들판을 보여주고, 하늘은 머뭇거린다. 머뭇거리다 마침내 완전히 어두워진다. 그런 순간에는 영혼도 조용히 지켜볼 것만 같다.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마지막 문단


오 모든 이여. 오 드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소중한 모든 이여, 그런 의미가 아닌가?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우리가 알고 있는 아주, 아주 작은 부분을 빼면     

하지만 우리는 모두 신화이며, 신비롭다. 우리는 모두 미스터리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오, 윌리엄!


결국 내가 극복해야 하는 것들이었음을 그리고 나는 알지 못하는 다른 삶의 무게를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질타의 시선은 보내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이야기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죽을 때까지 온전하게 완성되지 못하리라. 인간은 결코 완성되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루시 바턴, 윌리엄 그리고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전해주는 따스한 위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나만의 결핍을 잘 보듬고 오늘의 소중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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