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존 윌리엄스:알에이치코리아:2014)
1965년 발표된 소설이 50년 만에 전 세계를 매료시켰다. 그러니까. 2014년에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켰다.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19살에 대학에 입학했고, 8년 뒤 1차 세계대전 당시 박사학위를 받고 강사였다가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로 시작하여 스토너가 대학입학 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를 순서대로 나열한 소설. 나는 56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의 이야기가 2014년에 사람들에게 슬픈 감상을 일으키며 계속 읽힌 이유를 계속 궁금해하면서 읽었다.
19살 이전의 스토너는 작은 농장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계속 부모님의 일을 도우며 살아가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19살에 그의 아버지가 농사를 더 잘 지으려면 필요하다는 농과대학에 보내기 위해 스토너를 미주리 대학에 보내면서부터는 달라진다. 그 이후의 스토너의 삶은 끊임없이 스토너가 선택한 것으로부터 기인된다. 그러니 나는 그의 삶이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하나도 안타깝거나 슬픈 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제나 고민하고 결정했다. 나는 이 길을 가겠다고. 스토너의 친구 고든핀치가 마지막에 스토너에게 하는 말은 내 입장에서는 정확하다고 보였다. 핀치의 얼굴에 유령처럼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 정말로 못된 고집쟁이 영감이 되어버렸구먼.” p 372
스토너는 영문학을 사랑하게 되고 전과한다. 부모님이 연결해 주신 집에서 숙박을 해결하고 그 집의 농사일을 소처럼 도우며 영문학 공부도 열심히 한다. 그가 졸업할 때 많은 학생들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젊은이들이 패키와 의무감 같은 것들에 휩싸여서. 그러나 스토너는 학교를 지키는 것을 선택한다. 남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스토너는 투쟁과 변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런 그의 삶도 언제나 투쟁이었고 변화였다. 그는 농부가 되지 않고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힘들고 지칠 때도 언제나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더욱 몰두하였다. 그가 사랑하는 일은 영문학과 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우리 주변에서 있을 법한 한 사람의 이야기다. 어디에 이름을 알리지도 않았고, 평지풍파가 있었지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끝까지 유지한 사람이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암에 걸려서 죽었다. 두 번의 사랑이 있었고, 아이가 있었다. 사랑 중에 두 번째 사랑은 불륜이었다. 학교의 계파 간의 갈등에서 밀려 한직에 오래 있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제대로 반기를 들고 학장도 이겨먹어서 결국 하고 싶은 걸 가르치기도 했다. 영문학 교수로서 책을 한 권 썼지만 그 뒤로 가정과 개인적인 문제로 책을 더 써내지는 못했다. 그가 알고 공부하는 것들에 비해 적은 저작활동이라 할 수 있겠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스토너는 지금 이 시절이 지나고 나면 결코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녹초가 될 때까지 즐겁게 온몸을 바쳐 일하면서 이 시절이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과거나 미래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실망이나 기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지금 이 순간에 쏟으면서, 이제는 학자로서 자신이 해온 일을 통해 알려지기를 바랐다. p. 351
20살부터 그가 죽기 전까지 스토너의 고민과 생각들은 딱 그 당시에 우리가 하게 되는 것들이 들어 있다. 그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20살의 스토너 30살의 스토너 40살의 스토너, 50살의 스토너, 60살의 스토너는 모두 내가 아니면서 나이다. 표면적으로 그는 남성이고, 미국인이고, 50년대에 살았고, 교수였다. 그리고 그는 많은 선택에서 누구와 의논한 거나 주변의 상황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또는 머리가 하는 소리를 따라간 사람이다. 이것은 나와 다른 점이다.
반면에 그는 일이 생기면 고민하고 결정하고, 후회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가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후회에 그치지 않고 스토너는 선택한 길을 갔다.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미 선택한 길은 죽기 전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까. 이 점은 인간의 보편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토너는 인간이 어찌하지 못하고 이끌려 가는 인생의 보편적인 굴레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선택과 삶, 그리고 죽음을 잘 표현한 소설이라고 한 데다, 한 사람의 평범한 일대기를 이렇게 술술 읽히도록 썼다는 점에서 작가가 존경스러울 정도로 스토너는 잘 쓰인 소설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소설이 좋지는 않다.
그러니까. 왜 2014년에 이 책이 갑자기 사람들에게 발견되고 인기가 있었을까? '내 이름은 루시바턴'과 '오! 윌리엄'과 연결해 보면 '스토너'를 읽은 사람들은 루시 바턴과 윌리엄 소설책의 두 주인공과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사람이다. 그 시절에 스토너만큼 어른은 아니었지만 미국이 산업화되면서 농촌인구가 줄고, 세계 2차 대전으로 혼란스러운 한 시기를 보낸 사람들. 나 또한 세 인물에게 공감하는 바가 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말처럼 모두를 도시로 자식을 어떻게든 보내던 시기에 농촌에서 자랐으니까.
스토너의 삶은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386세대의 모습을 닮았다. 미국에도 그런 세대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공감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 유려한 문장, 한 명 한 명의 삶은 멀리서 보면 작지만 가까이서 보면 나름의 위대한 서사가 있다는 점을 잘 드러낸 이 소설은 무척 훌륭하지만, 사실 나는 읽는 내내 불편했다. 스토너의 자기변명적인 모습이 눈에 거슬렸고, 그를 둘러싼 여자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들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스토너와 같은 비장애인 남자들만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 게다가 스토너의 부정조차도 아름답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그린다.
물론 이 책은 스토너의 입장에서 쓰여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인생의 서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으니. 그래서 더 불편한 지점이 있다. 책의 저자의 시선이 고스란히 그런 모습일 듯하여. 그래서 나는 다 읽었지만...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싶진 않다. 책에 등장하는 스토너의 부인, 딸, 불륜녀, 그와 대적하는 장애를 가진 로맥스 교수 모두의 입장에서 나온 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이 훌륭하다고 위대하다고 하니... 이건 그냥 나의 주관적인 감정의 문제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