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오스카와일드:펭귄클래식
그 그림은 자신의 양심과도 같았다. 그렇다, 그것은 양심이었다. 그는 그림을 없애버릴 것이다. p. 355
열린 책들에서 출판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책 뒷면에는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이 적혀 있다.
도리언 그레이는 내가 되고 싶었던 존재이고,
헨리 워튼 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고,
바질 홀워드는 실제 나의 모습이다.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는 옥스퍼드 대학을 입학할 정도의 재원이었다. 게다가 오스카 와일드의 얼굴을 보면 지금 봐도 미남자에 화려한 스카프, 모자, 곱실거리는 단발이 무척이나 조화롭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는 1854년에 태어나서 세편의 단편과 유일한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1891년에 써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사회희곡 작품을 썼다. 그러나 1895년 외설혐의로 체포되고 2년의 복역 후 1900년 죽음을 맞이했다. 화려완 외양, 외설혐의로 인한 복역과 상반되게 양심의 고뇌와 영국귀족사회에 대한 고발, 행복한 왕자에서 보이는 타인을 향한 동정 등을 보면서 나는 그 자신이 가장 도리언 그레이를 닮은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처럼 극명하게 대조적인 모습은 그의 쾌감을 자극했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점점 더 반했으며, 그 자신의 영혼의 타락에도 점점 더 흥미를 품게 되었다. 그는 주름진 이마에 낙인처럼 그려진 선이나, 지독하게 관능적인 입가에 스멀거리는 선을 세심하게 살펴보았고, 가끔은 괴기하고 무서운 환희를 느꼈으며, 가끔은 죄악의 징후와 노화의 징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끔찍한지 궁금하게 여기기도 했다. p. 225
이 책에 등장하는 세명의 주요 인물 중 헨리 워튼 경은 이미 망가진 귀족사회를 비웃는 한 편 그 속에 깊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을 비웃고, 조롱하면서 자신이 그 세상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에 반성이 없어 보인다. 바질 홀워드는 화가이다. 그는 도리언 그레이의 아름다움에 잔뜩 취해 사랑에 빠졌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귀족들처럼 똑똑하지만 행동하지 않고, 겁쟁이처럼 뒤에 숨어서 세상을 비꼬기만 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바질 홀워드는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타인에게 충고와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바질 홀워드에게 자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선물 받는다. 그런데 이 자화상은 도리언 그레이가 처음 사랑하게 된 여자에게 실망했다며 이별을 선고할 때부터 조금씩 변한다. 반대로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초상화를 완성하는 날 도리언 그레이가 소원을 빌었기 때문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얼굴대신 변해가는 초상화를 보면서 무서워했다가, 비웃었다가, 외면하기도 한다. 그러다 자기 합리화의 끝판왕이 되는데, 이런 자신의 모습을 견디지 못해 마약을 하고 살인을 하기도 한다. 종국에는 자기를 죽인다.
“영혼은 감각으로 치유하고, 감각은 영혼으로 치유한다!”그 말은 그의 귀에서 떠나지 않고 얼마나 울렸던가! 분명 그의 영혼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감각이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이 진실일까? 죄 없는 사람이 이미 피를 흘렸다. 그것을 무엇으로 보상한단 말인가? 아! 속죄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용서를 받을 수는 없어도 잊어버리는 것은 여전히 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잊어버리기로, 그 일을 짓이겨 버리기로, 사람을 문 살모사를 짓누르듯이 짓눌러 버리기로 결심했다. 정말로 바질 홀워드는 무슨 권리로 그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인가? 누가 그에게 다른 사람을 재판할 수 있게 만들었단 말인가? 바질은 끔찍하고 소름 끼치고 참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p. 302
그런 도리언 그레이의 자기 분열적인 모습은 책에 절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 읽고 행복한 왕자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책이 생각났다. 온전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행복한 왕자 동상은 온통 금빛을 두르고 눈은 사파이어 칼에도 보석이 있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자를 본 적이 없었는데 길 한 복판에 동상으로 서 있으면서 안타까운 사연들을 보게 된다. 동상은 잠시 쉬어가는 철새에게 자신의 보석과 몸에 붙은 금박을 떼어내어 사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도록 한다. 가난한 사람은 그 보물을 받고 아마도 조금은 형편이 나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왕자동상의 고귀한 뜻을 들어주던 철새는 제때 따뜻한 나라로 떠나지 못해 동상에 걸려 죽는다. 왕자 동상은 번쩍이는 것들이 다 벗겨졌다고 철거된다. 이 책을 읽을 당시만 하더라도 따뜻한 마음씨의 왕자와 새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그런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어른들은 읽게 했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 나니 행복한 왕자의 이야기가 다르게 읽힌다. 오스카 와일드는 겉과 속의 불일치에 대해 오래 고민한 사람으로 보인다. 아무리 속이 따뜻한 사연을 가졌어도 외양이 아름답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반면에 아무리 내면이 추악해도 겉이 아름다우면 무언가 진실된 것을 가졌으리라 사람들은 생각한다. 행복한 왕자의 마지막에 왕자 동상은 불에 녹여지면서도 결국은 행복했다. 도리언 그레이는 죽기 직전까지 아름다웠지만 행복했었냐고 물으면 글쎄라는 물음표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술을 많이 먹으면 술이 술을 먹는다는 말처럼 도리언 그레이도 이 모든 것에 취해서 지금 행복한지 불행한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 좋은가? 행복한 왕자? 도리언 그레이? 바질 홀워드? 헨리 워튼? 모두 내 안에 있는 양심이나 마음, 생각 같은 것들을 대변하는데 무엇을 가장 내세우며 살고 싶은지는 선뜻 고르기는 어렵다. 한 가지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은 오스카 와일드는 바질 홀워드 같은 자신의 양심 위에 헨리워튼이라는 화려하고 비틀어진 외양을 가지고 살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겉과 속을 예민하게 탐구하느라 사는 게 힘든 일이라는 인식을 가진 작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선하다는 건 자신의 자아와 조화를 이루는 거지.” p. 154
펭귄 클래식의 번역본을 읽으며 이 책은 사람의 내면통찰하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니까 곳곳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거나, 나는 그래서 어떤 사람이지? 라든가, 양심이란 뭘까? 같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하는 감탄스러운 말들이 엄청 많다. 그러나, 한 문장 문장이 너무 길어서 어디서 끊어야 하지 라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혹시 다른 번역본은 다른가 했는 데 사용하는 단어는 조금 달라졌을지 몰라도 문장은 역시나 길었다. 내가 원어로 읽을 것은 아니기에 오스카 와일드가 문장을 이렇게 썼구나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마치 고전 희곡 같은 경향이 있다. 장소를 설명할 때는 희곡의 앞부분에 무대 상태를 설명하는 듯하게 말하다. 인물들의 대사나 생각도 연극적이며 장황하다. 요즘 희곡은 짧고 간결한데 셰익스피어, 안톤 체호프와 같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희곡을 보면 철학이나 심리학처럼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말을 인물들이 내뱉는데 지나치게 긴 데다, 나 같은 범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생각의 고리와 고리가 연결된 듯한 문장이 많다. 그런데 이 책도 그러했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유흥거리였을 이야기와 연극은 지루한 삶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한 없이 길고 어렵게 쓴 건 아닐까?
“차라리 미국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크게 외쳤다. “정말로, 영국 처녀들은 이제 기회를 잃은 거예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어쩌면 결국에 미국은 발견된 적이 없을 수도 있어요.”어스킨 씨가 말했다. “나라면 미국이 단지 감지되었다고 말할 겁니다.”p. 97
죄책감을 다스리는 아편도 있으며, 도덕적인 감각을 누그러뜨려 잠들 수 있게 하는 마약도 있었다. 그런데 이 초상화는 타락한 죄악의 가시적인 상징이었다. 파멸해 가는 인간의 영혼을 드러내 보여 주는 현존하는 표시인 것이다. p. 180
이 책은 1981년에 출판되었다. 당시 영국 귀족사회에 만연해 있던 다양한 문제를 오스카 와일드는 꼬집고 있다. 좁은 영국 귀족사회에서 남자 귀족들은 그리스 시대의 시민들처럼 서로의 지식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 했다. 한편으로는 평민, 여성, 미국과 같은 자신들의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지위가 올라가는 것이 불편해서 조롱을 일삼았다. 그러면서도 변화는 어려웠고 이에 대한 도피처로 아편을 일삼았다. 도리언그레이의 초상에 등장하는 귀족의 모습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상류층의 저급한 모습과 꼭 닮아서 계속 읽히는 고전의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처음의 도리언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등장한다. 그러다 어느새 그들에 물들고 나중에는 젊은 사람들을 비슷한 방향으로 이끌어 타락하게 한다. 이렇게 된 것은 도리언 하나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구조자체가 망가진 세상에서 탈출구는 없었다고 도리언 그레이는 변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에 가고 싶었다. 그는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p. 306
그러나 시빌 베인, 행복한 왕자, 철새, 바질 홀워드 같은 사람들도 세상에 있다. 그들은 일깨우고 세상을 바꾸려 노력한다. 그들이 오스카 와일드의 세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오스카 와일드도 결국에는 초라한 호텔방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는 도리언 그레이처럼 되고 싶다고 했지만, 스스로를 바질 홀워드 같은 사람이라고 지칭했듯 솔직한 사람으로만 살았다. 화려하고 속은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는 인간적으로 좀 괜찮은 사람이지만 가까이 하기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비참한 마지막은 안타깝게 보인다. 마치 행복한 왕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