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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Apr 25. 2024

완성된 조각의 뒷면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이희영 지음:창비:2023

부조는 그 나름의 분명한 아름다움이 있다. 부조 작품을 보며 누구도 조각된 면 너머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타인이 보여주는 모습을 존중하되, 그것이 전부라 단정 짓지 않으면 된다. 좋은 인상을 주었든, 나쁜 이미지로 남든 간에 말이다. 어른들의  말처럼 열 길 물 속보다 깊은 게 인간이니까. 243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2018년 아이가 부모를 선택하는 미래 세상을 그린 '페인트'로 창비청소년 문학상을 받은 이희영 작가의 2023년 청소년 소설이다. 책을 좋아하는 영어선생님이 다른 책을 대출하러 왔다가 이 책을 추천해 주셨다. 2023년 읽었던 최고의 책 중에 하나라고 하셔서 읽으려고 집으로 가지고 왔지만 생각보다 진도가 빠르게 나가진 않았다. 두껍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그랬다.


1월에 3분의 1쯤 읽다가 덮어두고, 2월에 읽다가 덮어 두었다가 4월에야 다 읽어 내려갔다. 이야기는 술술 읽히고, 페이지는 247페이지이며 행간도 넓다. 읽으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하루 반나절만에 다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반대로 재미가 없었다면 1월에 3분의 1에서 몇 쪽을 읽다가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잘 넘어가지 않은 이유는 괴리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적어도 20년 이상이 지난 미래사회다. 메타버스 세상이 활성화되어 있고, 사람의 목소리와 영상을 모아 진짜 사람처럼 대화를 할 수 있는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는 20세기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그 자체가 철저한 현실고증일 수도 있겠다고 자꾸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지금의 학교는 내가 학교를 다니던 20세기와 얼마나 달라졌냐고 하면 달라진 부분을 찾기 쉽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달라진 부분을 찾자면 또 많다. 그러니 미래의 학교도 분명 지금과 달라지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학교는 지금의 학교도 아니고 과거의 어디쯤에 머물러 있다. 그런 부분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부족하다는 점이 나를 자꾸 책에서 멀어지게 했던 것 같다. (이것도 작가가 의도한 부분일까?)


반대로 궁금증은 나를 계속 책으로 이끈다. 오래전에 쌍둥이처럼 닮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이 죽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형은 왜 죽었을까? 고등학생인 형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누구이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결국 어떻게 이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는 것일지가 궁금해서 다시 펼치고, 덮었다 펼쳤다. 이야기를 다시 펼치면서 처음에는 형을 잃은 가족과 선우혁에게 마음이 갔다. 이 아이는 무슨 이유로 형이 다닌 곳과 같은 학교에 진학을 했는지도 궁금해진다. 차차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선우혁의 친우인 도훈에게 눈길이 간다. 밝고 스스럼없는 도운은 왜 낚시 메타버스 세상에서 강태공 노릇을 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는 익명의 편지를 보내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게 된다.


인간의 마음은 볼 수도 없고,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이 전부도 아니다. 같은 세대, 비슷한 환경에서 산다 해도, 모두의 생각과 마음은 다르다. 그래서 오해가 쌓이고 미움과 다툼이 생기는 거겠지. 182


이 이야기는 선우혁이 형의 학교에 가면서 형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내용이다. 어린 동생의 눈에 비친 선우진, 엄마와 아빠의 눈에 비친 선우진, 고등학교 친구의 눈에 비친 선우진, 담임선생님의 눈에 비친 선우진이 같지만 조금씩 다른 모습임을 선우혁은 형과 같은 나이가 되어 알게 된다. 우리는 어떤 상황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내가 된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의도하기도 한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고등학생, 우정, 사랑에 빗대어 한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진정한 나의 모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한다.


도운은 학교에서는 밝고 모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지만 때로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조용히 사색을 한다. 극단적으로 다른 모습인 듯 보이지만 인간에게는 두 개의 시간이 모두 필요하다. 선우진은 집에서는 다정한 아들이자 형이었지만 교사에게는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한 학생이었다. 이런 책을 읽고, 학교에 있는 700명이 넘는 학생을 지나쳐 가고 있으면, 그들에게서 그 나이만큼의 역사와 깊이가 느껴지는 기분이 된다. 이럴 때 타인이 나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은 의심이 아니라 이해다. 인간이니까 가능하며 그렇기에 아름답다고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말한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 뇌의 성장이 급격하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작은 방 크기였던 뇌가 운동장만큼 넓어진단다. 아마 그때의 아이들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같은 고민을 끊임없이 하고 좌절한다.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마음과 혼란스럽게만 보이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들끓는다. 그렇게 화를 내고 또 반성하고 자책한다. 그런 고민과 성장을 하고 있는 사춘기 아이들이 읽으면 위로가 되어 줄 책이다.


혹여 수민 형이 알고 있던 건 겉으로 보이는 한쪽 면이 아니었을까. 보이지 않는, 어쩌면 보여 주지 않은 그 이면에서는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였는지도 몰랐다. 인간에게도 때로는 보호색이 필요하니까. 눈에 띄지 않게 주위의 환경에 적당히 섞여 들어가야 하니까.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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