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없는 달리기
나름 의지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중학생 때는 주말만 컴퓨터를 사용하기로 약속 했었는데 그 약속을 지키고자 하였던 의지력(하지만 정말 쉽지는 않았다)과 그리고 주말 게임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났던 강한 의지력 등으로 미뤄 보건대 나름 하고자 하면 한다는 나였다(그랬다고 믿는다).
하지만 의지력은 나이와 반비례 한 것일까? 한 해 두 해 지나며 의지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정신승리 기술까지 익히게 되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달리기만큼은 꾸준히 하려고 했었는데 2020년의 코로나19 사태와 최근 시베리아 기단에서 배달 온 북극 강추위에 조금 남은 의지력마저 제대로 털리고 있다. 탈탈탈
우리에게 의지력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의지의 비밀은 무언가를 끈기 있게 해내면 결국 어떠한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깔려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의지력은 생물들의 생존 요소 중 빠질 수 없는 본능이었을 테다.
현대까지 남아 있는 수많은 생물들은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거듭되는 진화를 통해 지금 이 자리까지 섰다. 그리고 그 진화에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종의 번식과 삶에 대한 의지가 있었기에 발현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배고픔과 추위를 극복하고자 했던 호모 사피엔스는 그들보다 거대한 매머드 사냥으로 이어졌고, 삶에 대한 의지는 초봄에 떡갈나무 아래 자라는 버섯은 먹어서는 안되는 독버섯임을 학습하게 하였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갈구와 삶에 대한 의지는 결국 종의 번식과 생존이라는 보상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다시 의지를 자라게 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달콤한 보상에 대한 기대감을 주는 방법일 테다. 하지만 이 보상에 대한 기대감도 반복되면 익숙해져 의지가 가라앉기 일쑤다.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우리들의 반복되는 삶의 알고리즘에 대한 변주를 제안한다.
내가 퇴근을 하면 힘이 나는 이유는 지루했던 사무실에서의 활동이 끝나고 이제 나를 위한 활동을 시작한다는 생각 스위치의 전환이 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반복이 지루해진다면 퇴근 후 곧장 카페를 간다든지 체육관으로 향하는 방법이 있을 테다. 혼자 달리는 길이 외롭다면 모임을 찾고, 연락하고, 만나서 함께 달리는 방법이 있다. 매일 같은 코스를 달리는 것이 지겹다면 평소 코스의 반대로 달려보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생각 없이 그저 발을 내디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주말에 늦잠을 잤다면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해보기도 하고, 낮에 잠을 자고 대신 모두가 잠든 밤에 활동을 해본다.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내가 관심 있어 할법한 것만 알려준다면 로그아웃을 하고 접속하거나, 친구와 아이디를 바꿔서 접속해볼 수도 있겠다. 나의 사고와 행동 알고리즘에 대한 아주 사소한 조정이 얘기치 못한 결과를 가져다줄 때, 우리가 새롭게 느낄 흥미라는 보상과 함께 한 번 더 진화하는 힘으로 돌아온다.
지난겨울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거리의 연주자가 떠오른다. 한 번쯤 들어봤을법한 피아노 선율이 마치 CD를 틀어놓은 것 깔끔하게 흘러나왔다. 그저 그런 감흥으로 지나가던 사람들 속에서 연주자는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곡을 시작하였다. 라이브에서 나오는 생생한 변주는 나의 감정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내 거리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흥미와 재미가 생기고 색다른 경험이 된다.
우리에게 똑같은 것은 없다. 삶의 변주를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삶의 재미를 느끼고 또 새로운 것을 향한 의지를 활활 불 태우길 바란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 우리 존재에게는 얼마든지 스스로를 바꿀 수 있는 의지가 새겨져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