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의외로 책을 잘 고른다. 어른인 내가 선택하는 책은 무의식적으로 기준틀이 고정되어서인지 한정된 범위 안에서 선택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장르의 책을 보여주고자 고른다고 고른 책이 거기서 거기 일 때가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다른 것 같다.
파주 출판단지에 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갔다가 아쉬운 마음에 서점에 들렀다. 아이들에게 원하는 책 2권씩 사주기로 했다. 뭔가를 사준다니 아이들은 신이 났다. 생각보다 빨리 책을 골라왔다. 아이 둘이 골라온 책은 나도 처음 보는 그림책이었다. 제목을 보자니 내 기준에서 괜찮아 보이는 것도 있고,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일단 아이들이 원하는 책을 사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토를 달지 않고 계산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책 4권을 여행 선물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우리는 잠 자기 전에 책을 펼쳤다. 아이들은 본인들이 고른 책이니 얼른 읽어달라고 떼를 썼다.
우리가 함께 읽은 책 제목은 '좋아서 껴안았는데, 왜?'라는 책이었다. 책을 읽어주기 전에 제목만 봤을 때는 뻔한 내용일 것 같았다. 다른 사람 불편해할 만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겠거니 했다. 큰 기대를 안 하고 읽어 내려가는데 정말 무릎을 탁! 쳤다.
조용한 ADHD를 가진 첫째가 나에게 나름 애정 표현을 한다고 중간 과정 없이 훅 치고 들어올 때가 있다. 아이의 사랑 표현이지만 뭔지 모르게 미세한 불편함을 느낄 때가 있다. 성급하게 다가오는 행동이 받아들일 몇 초의 준비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 모습이다. 일부러 한 행동은 아니지만 그럴 때는 참 당황스럽다. 나뿐 아니라 둘째도 종종 이런 행동에 언니가 불편하기도 한 것 같다.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없지 않아 보인다. 마음은 그럴 의도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아이에게 조심하라고 뭐라 말하기도 애매하다.
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아이여서 좀체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끊고 들어올 때가 많다. 둘째랑 대화하는 중에도 갑자기 떠오른 말을 하고 싶어 불쑥 끼어들면 둘째는 언니가 야속하기만 하다. 주의도 주고 상대방 기분도 생각해보라고 첫째에게 말해보지만 ADHD 특성이 쉽게 고쳐질 리 만무하다. 그걸 알기에 다그칠 수만도 없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상대방이 왜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났는지 모르거나, 어떨 때는 알지만 조절하기 어려운 자기 자신이 밉기도 한 것 같다. 또 그런 상대방이 자기를 불편해하고 미워한다는 감정도 충분히 알아채서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한동안 슬픔에 빠진 적도 있었다.
악의를 가지고 괴롭히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에게 설명하기 참 어려웠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나와 아이에게 명확한 기준점을 제시해줬다.
경계선
나와 너를 매정하게 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조율 가능한 완충 공간을 존중과 배려라는 의미로 이해시켜주었다. 세상에는 국경선이나 차도 같이 분명한 선 외에도 소유물, 몸, 기분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경계선이 있다고 했다. 책을 읽어주면서 아이들 눈이 반짝반짝한 게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갑자기 머리가 확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다니! 나도 '경계선'이라는 어휘 하나가 관계 속에 있던 모호한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 가능하다는 사실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경계선을 넘을 때는 '똑똑' 두드려 보라고 적혀있었다. 넘어가도 되는지 먼저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자기 물건의 경계선에 들어와도 되는지, 마음의 경계선을 넘어도 되는지 말이다. 경계선에 들어오는 걸 거절당할 수도 있지만 상대방의 의견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상대방은 자신의 경계선을 지키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포인트는 싫다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허락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부분이다. 대인관계 속에 은연중 강자와 약자가 생기기 마련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존중과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에 비대칭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건 아닌가 나 조차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또 다른 사람의 경계선만큼 내 경계선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나왔다. 내 경계선에 무단 침입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남이나 친구뿐만 아니라 가족 사이에서도 지켜져야 할 영역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자 아이들은 자기 몸의 경계선과 엄마, 언니, 동생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가가도 되는지 '똑똑' 노크를 하였다. 이 책을 구입해서 읽은 지 근 5~6개월은 흐른 것 같다. 요즘은 아이 둘에게 경계선이란 말이 콕 심어진 것 같다. 티격태격할 때는 '왜 내 경계선 넘어?!'라고 가끔은 격하게 말할 때도 있지만 미세하게 경계를 조율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ADHD 첫째는 아직 대인관계에서의 섬세한 사회성이 서툴러 보인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경계선을 조심하는 모습은 작지만 눈에 뜨인다. 어른인 나조차도 아직 인간관계가 어려운데 이제 겨우 손가락 꼽을 정도의 햇수를 산 아이들에게 쉬울 리 없을 거다. 좀 재미있어 보려고 무심코 던진 농담이 썰렁하거나 나름 생각해서 했던 내 행동이 그다지 도움되지 못 했던 상황 하나하나가 혹시나 경계선을 넘진 않았었나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렇게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책 뒷부분에 신체적, 물리적인 부분뿐 아니라 언어적, 정서적인 개인 영역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적혀있다. 우연찮게 고른 아이들 책이지만 어른인 나도 느끼는 점이 참 많았던 양서(良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