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낭 Apr 30. 2022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가 주어진다면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읽고 글쓰기

주변이 조용해지고, 잡념이 머릿속에서 사라졌을 때, 혼자만의 방에 앉아서 공기 중에 떠오른 먼지들을 보고 있을 때, 완전한 안전함으로 가득 찼을 때―갑자기 ‘아, 나 지금 행복하구나.’하고 느낄 때가 있다. 감정을 단정 지어 표현하는 게 어려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수백 번 자신을 의심하며 망설이던 사람인데도 그런 순간은 급작스럽게 밀려온다. 내가 차지한 나만의 공간에서 나는 몸을 쭉 뻗어 운동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창문가에 멍하니 서서 다 마른 빨래를 못 본 척 한 채 지나가는 사람들과 맞은편 어린이집의 등나무를 하염없이 구경할 수 있다. 화분과 구름과 노을을 볼 수 있다.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릴 때 자주 ‘멍때리지 마’라는 말을 들었었다. 나는 그 말이 참 이상했다. 어디가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댈 수 없는 나이에도 그 말이 이상했다. 어떤 공간도 차지할 권리가 없는 어린 아이에게 머릿속 공상의 세계는 쉽게 도망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툭, 건드리면 나는 가짜 안락 속에서 끄집어내져 어색하게 발을 디뎌야만 했다. 그 어린 아이에게 자기만의 방이 있었다면, 밤새도록 책을 읽어도 혼나지 않았더라면, 교과서나 책상 귀퉁이에 그림을 그렸다가 누가 볼세라 다시 지우지 않아도 됐었다면, 깊은 밤 양 옆 어깨에 딱붙어 곤히 잠든 동생들과는 상관없이 뻗어가는 상상들을 붙잡으려고 허우적대며 잠든 척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자기만의 방의 메리 시턴(혹은 메리 카마이클)이나 우정리노트의 김자빱처럼 내가 누군가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산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비혼여성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생계를 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여성에게 기회를 주는 일을 하겠다. 여성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여성을 위한 행사를 열고, 여성 창작자들을 후원하고, 여성이 만든 물건들을 팔 것이다. 무해한 비건 음식을 여성들에게 대접할 것이다. 가부장제로 편입되길 거부하는 어린 여성에게 일자리를 줄 것이다. 여성이 여성을 가르치게 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나 레즈비언들이 활개 치게 둘 것이다. 밤이건 새벽이건 여성들이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어떨 때는 소리 지르고 싸우고 파티를 하게 할 것이다. 그러고는 헤어져 인사하고 각자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가겠지. 그 발걸음은 홀로일지라도 외로울 리 없고 적막할지라도 공허할 리는 없다.

작가의 이전글 미안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