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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부치를 위한 변론

엄마에 대하여(2)

by 지연

가부장부치. 부치란 레즈비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남성성’을 수행하는 레즈비언을 말한다(라고 한다.). 부치는 레즈비언 문화 안에서도 티나는 부치(티부), 꾸러기 부치 등등 다양한 별명이 붙어서 불리는데, 아무래도 레즈비언 집단 중에서도 외적으로 특정되는 집단이기도 하고 놀려도 되는 것처럼 여겨져서 그런 듯 싶다. 그중에서도 가부장부치란, 재밌고 긍정적인 의미만 있지는 않다. 가부장이란 말이 붙었는데 좋을 리가. 가부장부치는 마치 ‘가부장 남성’처럼 여성혐오적인 언행(일명 ‘빻은 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 들면서 거들먹거리거나, 때로는 파트너에게 폭력까지 저지르는 부치들을 일컫는다.


가부장부치는 일종의 ‘미러링’으로 쓰이기도 한다. 페미니즘적인 관점을 가진 레즈비언들은 기존 레즈비언 문화의 부치와 팸(부치와는 반대로 ‘여성성’을 수행하는 레즈비언) 관계 도식을 거부한다. 이런 맥락에서 가부장부치는 부치 중의 부치, 거칠게 말하면 변화해 가는 시대를 못 따라잡는 부치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말로도 쓰인다. 페미니즘의 ‘ㅍ’도 모르고, 아직도 부치와 팸 관계 도식에 집착하며, 남성보다도 남성성을 더 과시하는 그런 레즈비언 말이다. 문화란 변화 해가기 마련이고 페미니즘적인 변화는 당연히 환영해 마땅하다. 그런데 난 가부장부치를 비난하는 말들이 이렇게 들리기도 한다. “너는 어차피 가부장이 될 수 없잖아. 여자니까.”


나의 엄마를 가부장부치라고 한다면… 글쎄,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군가가 가부장부치냐 아니냐 둘 중 하나만 골라 대답하라고 닦달한다면 맞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겠다. 위에 내가 서술한 모든 특징들이 맞아 들어가기 때문에. 빻은 말? 맨날 한다. 여자는 작고 귀여워야 최고라고 말하는 게 나의 엄마다. 거들먹거리기? 장착된 태도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 여자 전부 후릴 수 있다고 믿는다. 파트너에게 폭력? …엄마의 명예를 위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글을 점점 쓰다 보면 밝혀지겠지만 엄마가 올바르고…도덕적인…그런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엄마를 가부장부치라고 부를 때 그 안에 비난의 의도만이 들어있다면 좀 슬플 것 같다. 엄마는 실제로 가장의 역할을 계속해서 해왔으니까.


어릴 적 엄마는 국민학교 중퇴 이후 동네 밭일이나 잡일을 해가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자신은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여동생은 고등학교까지, 남동생은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도록 학자금을 보탰다. 떠밀려서 결혼을 한 이후에도 전업주부만 하지 않았다. 학습만화 파는 일, 식당 허드렛일, 밭일 등등 그 시절 기혼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어느 날은 엄마가 아빠한테 식탁 다리를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식구는 늘어가는데 입식 식탁에는 4명밖에 앉을 수 없고, 아빠는 그 당시 공사장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던 터라 공구를 다룰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빠는 시간이 없던 건지 귀찮았던 건지 차일피일 미루며 안 잘라줬다. 날이 맑은 어느 날, 집 마당에서 엄마가 직접 톱을 들고 자로 대가며 식탁 다리를 직접 잘랐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엄마는 더 많은 시간을 가족을 위해 일했다. 엄마는 내가 본 내내, 아니 그냥 평생 동안 가장이었다.


가부장부치는 구리긴 하다. 하지만 가부장부치인 엄마의 삶은 구리지 않다. 오랜 시간 동안 가족들을 위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해 봤던 경험들이, 세월들이 엄마에게는 자부심이 되었다. 엄마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이 과거에도, 지금도 자신의 가족을 책임지고 있다. 굉장히 많은 여성이 ‘가부장’은 아닐지라도 ‘가장’이다. 물론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긴 하다. 가장 역할을 하면서도 가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 굴레를 비판하고, 깨뜨리고 싶다. 하지만 어떤 가부장부치인 여성의 삶에 얹혀 나라는 한 인간이 먹여지고 길러졌다는 걸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다른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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