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같은 여성에게만 친애와 설렘을 느꼈다. 그리고 엄마도 그랬다.
엄마는 가난한 집 여덟 남매의 여섯째 딸로 태어났다. 제주도 남동쪽 바닷가인 작은 동네에서 엄마의 어머니는 물질이나 밭일을 근근이 하며 혼자서 여덟 남매를 키우셨다. 엄마의 아버지는 집집마다 TV가 없던 시절,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뉴스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말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돈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도박판에 갖다 바쳤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도시락을 못 싸가서 점심시간에 학교 운동장 수돗가에 가서 물을 마시면서 배를 채웠다. 4학년 때, 남들 다 가는 소풍을 돈이 없어 못 가겠다고 담임 선생님에게 말을 했더니 담임 선생님은 자기 돈을 털어 소풍을 보내주셨다. 결국 국민학교 졸업은 할 수 없었다. 엄마는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엄마 위의 남매들은 전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 나가고, 엄마는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집에 남아서 할머니 일을 도우며 동생들 학비를 보탰다. 지금은 30대가 넘어서 결혼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때는 20살만 넘어도 노처녀가 되기 전에 어서 결혼하라고 보채던 시기였다. 엄마는 결혼하지 않고 집에 남아서 가족을 부양하고 싶다 했지만, 엄마의 오빠는 허구한 날 집으로 찾아와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할머니와 엄마를 윽박질렀다. 결국 엄마는 바닷가 고향을 떠나서 시내로 시집을 갔다.
엄마가 해준 이야기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엄마의 바로 위 다섯째 언니 이야기와 엄마의 첫사랑 이야기였다. 엄마는 다정하고 착한 다섯째 언니를 제일 의지했는데, 결혼하고 나서 가정폭력에 시달렸다고 했다. 결국은 폭력에 시달리다가 죽었지만 사고사로 처리되어 가해자인 남편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 동네사람들 모두 언니가 누구에게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엄마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네 친구를 사랑했다. 엄마는 그 사람의 사진을 내게 보여주며 엄마의 눈에는 그때 그 여자애가 얼마나 예쁘고 똑똑했는지, 손을 잡거나 껴안고 있었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말해주었다. 그 친구도 스무 살이 넘자 곧 결혼했다.
엄마의 결혼은 엄마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엄마는 남들 다 하는 결혼 생활에 충실하려고 애썼고, 그렇게 첫째인 내가 태어났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난하지는 않게 살아가던 중에,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가 일어났다. 아빠는 회사에서 실직되었고 이후에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때에 공사장 일터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다. 당시에 돌이 막 지난 막내를 업은 채로 엄마는 상주가 되었다. 엄마에게는 집 한 채와 약간의 위로금, 다섯 명의 자식만이 남았다. 집을 팔고 이사를 가면서도, 자식들을 입양 보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안 해 본 일 없이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티며 가정을 지켰다.
내가 자라 20대 후반이 되고 직장 생활이 안정되자, 엄마는 나에게 결혼을 하라고 했다. 남들 다 하는 데 너만 안 할 수는 없다고, 결혼하지 않으면 지금은 좋겠지만 홀로 쓸쓸하게 늙어 죽을 거라고 했다. 이러한 엄마의 역사를 알고 있는 나에게, 엄마는 엄마의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던 그때에!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