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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낭 Jan 20. 2022

0.6cm의 이물감

2021년 갑상선암 진단과 수술까지의 기록

2021년 8월, 이번에도 아니라면 이건 분명 정신 쪽 문제다, 내 발로 정신과에 가겠다는 각오로 갑상선 전문 내과를 찾았다. 2021년 초부터 조금씩 지속되었던 목 이물감이 점점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안 그러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해지는 이 감각은 그냥 작은 음식물이 목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일 때도 있었고, 심할 때는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중학생 때 친구가 장난삼아 손으로 목을 조른 이후로 안 그래도 목 주변의 감각이 예민한 편인데, 목 이물감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어느샌가 불편한 순간이 불편하지 않은 순간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식도염 혹은 위염인가 하여 이비인후과와 내과를 찾았다. 나름 큰 병원에도 갔다. 의사들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몇 번의 질문 후 비슷비슷한 약들을 처방해주었다. 약을 꼬박꼬박 먹고 식도염에 나쁘다는 습관들을 피해도 나아간다는 느낌이 없었다. 이때부터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을 시작했다. 진단과 처방으로 낫는 아픔이 아니라면 '진짜 아픔'이 아닐 것이다. 스트레스나 정신적인 질환에 따른 아픔일 것이라고. 그래도 정신과에 가기 전에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갑상선 전문 내과에 가서 혈액 검사를 한 번 해보고 오자고 생각한 것이 다행이었다.


갑상선암 진단 그리고 수술이라는 결과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몇 번이고 깨어 넘어야 했다. 주변에서도 갑상선암은 딱히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증상을 느꼈다면 갑상선암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가봤던 갑상선암 전문 내과에서는 일반 내과에서 갑상선암으로 의심된다는 소견을 먼저 듣고 왔어야만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우연찮게 몇 번 읽었던 갑상선암 투병 후기에서도 건강 검진이나 다른 병을 치료하다가 암을 발견했다는 얘기만 있었지, 나처럼 목 이물감 증상을 느끼고 자가진단으로 찾아냈다는 얘기는 없었다. 


고작 0.6cm인데도 느껴졌던 암세포(수술 후 조직 검사로는 0.8cm라고 했다.)

결국은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거친 후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고, 놀랐고, 어이 없었다. 수술을 위해서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겨갔고 3개월 후인 12월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영문을 모르던 감각의 실체를 알게 되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드니 의외로 금방 진정이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종양이 1cm미만으로 작은 편이고 주변 전이 가능성도 없어보이니 갑상선의 반만 떼어내는 반절제를 하면 된다고 하였다. 수술 코디네이터 선생님은 목 절개술과 겨드랑이 로봇 수술을 비교 설명해주셨는데, 비용의 차이가 꽤 커서 목 절개술을 선택했다. 첫 진료날에 수술 날짜를 잡고 CT도 처음 찍었는데, 생리식염수가 온 몸으로 퍼지는 느낌이 진짜 별로였다. 아무튼 대학병원으로 인계되고 나니 물 흐르듯 척척 진행되는 절차에 몸을 맡기면 되었다.


그 다음 문제는 직장이었다. 온 인터넷을 뒤져서 갑상선암 수술 후기를 찾아보았다. 나는 암 초기였고 갑상선암은 특히 항암 치료도 없는 경우가 많고 예후가 좋다고 들었기 때문에 치료 과정 자체는 걱정되지 않았는데, 직장을 쉬는게 걱정이 됐다. 다른 직장인들은 병가를 어느 기간 동안 썼는지, 수술 전후로 며칠을 쉬었는지가 궁금했다. 갑상선암은 보통 수술 후 2주가 지나면 일상생활이 가능하지만, 1달 정도는 큰 소리로 말하거나 무거운 물건을 드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1달 정도는 쉬어야 한다고 한다. 인터넷 후기들도 1~3개월 정도 쉬는 것이 보통이었다. 연말에 일이 바쁘기 때문에 처음에는 수술 후 3주 정도를 쉬고 복귀할까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만류했다. 최종적으로는 2달 정도 일을 쉬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동네 요가를 6개월치 끊었다. 현재로서는 목 이물감 외에 특이한 증상이나 조심해야 할 것도 없고, 수술 전에 체력을 미리 길러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나마 빠지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요가를 시작했다. 후기 같은 것도 별로 찾아보지 않고 무조건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으로. 결론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병가 쓰기 직전 안 그래도 몰아치는 일들을 미리 끝내느라 바빠 죽을 것 같은 와중에 저녁 시간 운동은 스트레스를 덜어주었다. 평일 저녁에는 운동이나 회의를 갔고 주말에는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 소식도 전하고 술도 조금씩 마셨다. 수술 후에는 몇달 간 모임도 술도 자제해야할 것 같아서 미리 해치워버리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돌아다녔다. 지금 돌이켜보면 암 진단 받고 수술 직전까지 참 바쁘게 살았지 싶다.


친구랑 안면도에 놀러가서 게국지 먹었다.

수술 전 검사를 위해 병원 갈 때는 보호자 없이 거의 혼자서 갔는데, 코로나19 이후로 서울에 오랜만에 가는 거다 보니 나들이처럼 되었다. 한 번은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 격려차 병원에 같이 가줬고, 한 번은 애인이 멀리서 올라왔다. 작은 병도 아닌데 병원에 혼자 보내는게 싫다고 했다. 아직 입원한 것도 아니고, 지방에 사는데 서울까지 온다니 미안하기도 했지만 애인이 많이 걱정하는 눈치라서 오는 김에 같이 서울 데이트나 하자 했다. 넓은 병원에서 헤매다가 겨우 만나 점심을 먹으려고 병원 푸드코트 자리에 앉았는데, 나 주려고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온 애인을 보니 괜스레 눈물이 났다. 신기하게도 애인을 만나고 있을 때에는 목 이물감이 없어진다. 대신에 눈물샘은 허벌이 된다. 이후에 또 수술 잘 하고 오라고 해바라기 한 송이, 병실에서 쓸 텀블러랑 가글을 받고도 역 한복판에서 훌쩍거리며 울었다.


12월 중순이 수술이었는데 12월 초는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사실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나지만, 그 많은 일들이 어떻게 그렇게 다 마무리 지어졌는지가 신기할 노릇이다. 나중에 돌아와서 보충할 수 있는 부분은 얼렁뚱땅 하고, 나 대신 일할 사람을 구하고, 그래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건 상사에게 맡기고 어떻게든 수술날이 되었다. 수술 전에 수술 준비를 하기 위해 병가를 며칠 쓰기도 한다던데 그러지 않았다. 일도 많았고 무엇보다 설마 간단한 수술 준비에 그렇게 며칠씩이나 필요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술 직전까지 일이 펑크가 날까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전전긍긍했던걸 떠올려보면 숨 돌릴 시간이 약간 있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애인, 가족, 직장 동료, 친구 등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과 격려와 선물을 받았다. 나는 줄곧 갑상선암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주변 사람들은 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 것 하나도 잊지 않고 돌려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수술 전날 오후에 입원 수속을 했다. 같이 사는 동생이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입원을 위해 둘 다 코로나19검사를 사전에 받고, 인터넷 후기를 뒤져 입원시 필요한 준비물을 캐리어에 넣어 챙겨갔다. 쌀쌀할까봐 챙긴 후드 가디건과 선물로 받은 텀블러, 2m짜리 충전케이블이 꽤 요긴했다. 일요일에 도착한 병원은 평소와 달리 조용했고, 나처럼 수술 전 입원을 하러 온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몇 팀 있었다. 여러가지 서류와 보호자 명찰을 받아 암병동으로 이동했고 운이 좋게도 5인실의 창가 자리를 배정받았다. 코로나19때문에 병실이 많이 부족해서 병원 측에서 1인실, 2인실을 쓰게 될 수도 있다고 미리 안내받았는데 그러면 입원비가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생이 더위를 많이 타는 터라 환기가 잘 되는 창가 자리가 딱 적당했다. 덕분에 기대도 안 했던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며,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다가 잤다.


병실 씨티뷰

암병동 분위기는 생각보다 밝았다. 내가 입원한 병실은 모두 4~5일이면 퇴원하는 갑상선암 환자만 있어서 심각한 분위기가 아니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복도에 아기와 어린이들이 꼭 한 명씩은 돌아다녔다. 간호사와 직원 분들은 어린 환자에게 무척 친절했다. 병실 벽면에는 귀여운 캐릭터들이 꾸며져 있었고, 병동 안에 어린이들을 위한 공부방도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오랜 입원 생활을 한다는게 안타깝기도 했고, 다시금 세상에는 나이와 상관 없이 아픈 사람들이 참 많구나 싶었다. 가끔 병동에서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거슬리기보다는 어디가 그렇게 많이 아픈걸까 상상하면서 슬퍼졌다.


월요일 아침에 수술을 한다고 해서 전날부터 금식을 했는데, 의사선생님께서 하루에 여러 명을 나이 순서대로 수술을 하다보니 내 순서가 많이 밀리게 됐다고 했다. 나이 어린 순부터 수술을 한 건지, 나이 많은 순부터 수술을 한 건지 정확히 모르겠다. 같은 병실 맞은 편에 입원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환자가 먼저 수술하러 간거 보면 아마 어린 순부터 한 것 같다. 오후 3시가 수술 예정 시간이라고해서 그때까지 금식을 하며 기다리느라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4시가 다 되어서야 수술실에 들어갔고, 침대에 누워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술 대기실로 이동했다. 대기실에서 의사선생님과 몇 가지 질의 응답을 하고, 마취에 대한 주의 사항을 듣는데 지금 내가 겪는 현실이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침대에 팔다리가 고정되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밖에 못 하고 누워있자니 몇 분이라는 시간이 참 느리게 흘러갔다. 천장에 고난이 어쩌구하는 성경 구절이 크게 쓰여있었는데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수술대 위에 올라갔고, 마취 가스를 들이마시고 나서 왜 이렇게 정신이 또렷하지? 하고 생각이 들 때에 의식이 끊겼다.


깨어나니 회복실에 있었다. 수술 전에 들은 주의사항을 상기시키며 다시 잠들지 않으려 애써 심호흡을 했다. 이때는 자다 일어난 것처럼 몸이 좀 무겁다는 느낌 외에 별게 없었는데, 다시 병실로 돌아오니 너무 피곤하고 힘이 쭉 빠졌다. 수술 부위인 목과 어깨 부분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고 숨 쉴 때마다 가슴이 뻐근했다. 조금 쉬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죽을 먹었는데 죽 한 입도 삼키기 힘들어 짜증이 났다. 링거 때문에 코앞에 있는 화장실 하나 왔다갔다하는 것도 불편했다. 불편한건 내몸인데 괜히 옆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있는 동생에게 신경질이 났다. 한편으로는 예민해진 내가 낯설게 느껴지면서 아프면 어쩔 수 없이 이런 불합리한 감정이 드는구나, 싶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회복되어 가는게 느껴졌다. 수술 다음날 오전부터는 산책도 했고, 오후에는 혼자서 샤워실에서 머리도 감았다.


목 3cm 절개하여 갑상선 반절제. 수술도 회복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예정대로 수요일에 퇴원하게 되었다. 의사선생님은 회진 때 백팩을 멘 채 커튼을 걷으며 괜찮죠?한마디하고 가셨다. 의사의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의사선생님이 여자 분이고 쿨하셔서 좋았다. 수술 후 간호 요령과 주의해야 될 사항들을 듣고, 진료비를 결제하고 약을 받아 3박 4일만에 퇴원했다. 회복했다고는 하지만 가는 길에 힘이 쭉 빠져서 짐들은 동생에게 맡겨버렸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래도 잘 먹고 살아야지, 하면서 마켓컬리에서 이것저것 시키고 애인과 나눠먹을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주문했다. 일주일 후에 다시 내원해야 했지만, 내 방의 내 침대에 누우니 드디어 큰 이벤트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느껴지며 안정감이 들었다.


퇴원하고 며칠은 목 언저리의 근육이 많이 불편했지만 한달쯤 지난 지금은 괜찮다. 크게 불편한건 없고 말을 많이 하면 목이 금방 피로해지는 정도이다. 운동도 다시 시작했고, 실비 보험과 암보험 보상에 필요한 서류도 빠짐없이 챙겨서 처리했다. 앞으로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도 해야 하고, 3년 동안 매일매일 갑상선 호르몬제를 투여해야 한다. 이런건 잘할 수 있다. 주어진 일을 계획과 순서에 맞게 하나씩 처리해나가는 일은 오히려 쉽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이것이 큰 일인지 작은 일인지 감지해내는게 어렵지. 그래도 이 경험을 토대로 내 예민함을, 내 감각이 주는 신호를 더는 의심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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