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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한 Apr 11. 2024

아픈 손가락

    "선생님, 모둠 활동 해야하는데 영호가 안 와요. 나비 무섭나봐요."

    2년 전 4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였다. 3년 연속 5학년 담임을 하고 처음으로 다른 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다. 고학년 아이들의 케케묵은 갈등과 기싸움에 지쳐서 지원한 것이 4학년이었다. 학군이 좋지 않은 학교였지만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지금껏 맡았던 아이들 중 가장 괜찮다'고 말하는 학년이어서 조금 안심을 했더랬다.


    3월 2일, 8시쯤 등교하여 신발을 정리하는데 교실 불이 켜져 있었다. 새 학기 첫 날 긴장되는 마음으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이른 시간에 등교하는 아이들을 종종 봐왔기에 익숙했다. 덩치가 작고 동그란 안경을 쓴 앳되어보이는 아이. 그게 영호의 첫 인상이었다. 영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영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볼뿐 대답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조금 당황했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영호에게 다가가 아침 활동을 안내했다. 여기, 포스트잇에 선생님께 궁금한 점을 쓰면 돼. 여러 개를 써도 돼. 여전히 영호는 대답이 없었지만 아직 낯선 교실과 익숙해지는 중이겠거니 여겼다.


    8시 30분쯤 되자 교실이 꽉 찼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환경이 낯설지만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탐색하기도, 가방 속 물건을 정리하기도, 포스트잇에 글자를 끄적이기도 했다. 한 두명씩 포스트잇을 가지고 나와 '선생님께 궁금한 점' 보드판에 붙이기 시작했다. 첫 날 수업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시업식 영상을 볼 준비로 부산하게 움직이다 다시 교실을 둘러봤다. 영호가 처음 내가 본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영호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시 한 번 말을 걸었다.

"영호야, 선생님께 궁금한 점 없니? 연필 꺼내서 한 번 적어봐.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음식 뭐든 괜찮아."

영호는 여전히 내 쪽을 보지 않고 앞을 응시한 채 앉아 있었다. 흘끗 영호를 바라봤다. 영호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지, 몸이 아픈가? 왜 이러는거지?'

    시업식이 끝나고 교사 소개 시간이 되었다. 진진진가로 간략한 교사 소개가 끝나고 아이들의 자기 소개 시간이 되었다. 짧은 노래를 부르며 손동작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활동이었다. 내가 예시를 보이자 쑥쓰럽고 어색해하면서도 아이들은 한 명씩 자신을 소개했다. 영호 차례가 되었다.

"영호야,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했던 거 봤지? 손뼉으로 책상을 치면서 '내 이름은 ㅇㅇㅇ'하고 소개하는거야. 한 번 해보자."

그러나 영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이들이 책상을 치는 소리만 민망하게 울려퍼졌다. 나는 영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더 불렀다. 그러자 영호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결국 내가 대신 영호의 이름을 말하고 황급히 다음 활동으로 넘어가야 했다.


    첫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이스를 살펴봤다. 영호의 작년 담임 선생님은 안타깝게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신 상태였다. 작년 3학년 선생님들에게 영호에 대해 물어보았다.

"오늘 첫 날이었는데... 영호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앉아있더라고요. 원래 이렇게 말을 안 하나요?"

"아, 김영호? 그 키 작고 동그란 안경 쓴 애 말이지? 나도 걔 목소릴 들어본 적이 없어. 작년 담임 선생님도 2학기 되어서야 겨우 발표시켰다고 하던데."

특정 상황에서 발표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학생은 있었지만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발표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해서 계속 발표를 안 시킬 수는 없다. 다만 영호의 경우 시간이 필요할 듯 싶었다. 모둠 발표나 역할극처럼 꼭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얘들아, 영호가 아직 자리에 서서 이야기하는 건 부끄러운가봐. 영호에게 시간을 더 줄 수 있을까?"

다행히 아이들은 영호의 상황을 이해해주었고 모둠 발표를 할 때도 영호의 역할을 한 명이 더 맡는 등 배려해주었다.


    며칠이 지나니 영호의 긴장도 조금 풀어진 듯했다. 쉬는 시간에는 종종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했다. 모둠 활동을 할 때에도 모둠 내에서 곧잘 입을 열었다.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던 와중, 영호의 진단 평가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국어, 수학, 영어 모두 각 과목의 점수가 기준 점수에 크게 밑돌았다. 국어는 2-3학년 수준, 수학은 1-2학년 수준이었다. 수학 시간에 문제를 풀 때 아이를 지도하다보면 구구단은 6단부터 어려워하는 것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호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했다. 잔반 검사를 할 때 반찬을 남겨 한 번 먹어보라고 하면 '못 먹겠다'며 울먹거렸고, 나비를 무서워해 운동장에서 수업을 하거나 학교 숲 수업을 할 때면 저 혼자 덩그러니 서서 부들부들 떨 때가 있었다. 


    교실에 있으면 이상하게 다른 아이들보다 눈에 밟히는 아이가 있다. 나에게는 영호가 그런 아이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아이를 돕기로 했다. 말을 하지 못하겠다면 교실 앞에 나와서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된다고 말했고, 나비를 무서워하는 영호를 위해 손을 잡고 함께 있어주었다. 영호의 수준에 맞는 교재를 가지고 보충 학습도 시작했다. 가끔씩 엉뚱한 말을 하며 시간을 끌기도 했지만 영호는 대체로 잘 따라와주었다.


    그러던 4월 말이었다. 그 날은 동학년 선생님들과 함께 체험학습 사전 답사를 하고 저녁을 먹는 날이었다. 사진도 찍고 체험학습 프로그램도 고민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와중 휴대폰이 울렸다. 영호의 보호자였다. 상담 주간에도 이미 상담을 했고 학교 생활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데 무슨 일일까.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영호 엄만데요. 영호가 3학년 때는 안 그랬는데 4학년 올라와서 계속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갔어요. 4학년이 돼서 숙제가 너무 많아져서 그런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영호가 그렇게 말했다는건가요?"

"의사 선생님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가 아픈거라고 하는데요. 4학년 돼서 계속 아프다고 해서 보니까 숙제가 너무 많은 거 같애요."

"보호자님, 3학년보다 4학년 때 학습량이 많으니 과제가 많은 것도 당연한거에요."

"3학년 때는 안 그랬는데. 숙제 좀 줄여주세요."

     순간 영호가 가진 수많은 문제들이 머릿 속을 빠르게 스쳤다. 아, 이 아이의 문제가 학년이 갈수록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이거구나. 역시나 아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보호자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이가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힘들다고 하면 시키지 않는다. 문제를 알고 있음에도 그 문제의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린다. 이런 경우 교사가 아무리 열심히 지도해도 아이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렵다. 이제껏 해왔던 노력이 허무하게 느껴졌고,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겪게 될 어려움이 눈에 선했다.

    

    영호는 4학년이 끝날 때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비를 보면 얼어붙었고, 발표할 때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구구단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하지만 영호는 자신이 좋아하는 과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눈을 반짝거렸고, 그 날에 배운 내용을 배움 공책에 야무지게 썼다. 학년이 끝나는 마지막 날, 종업식을 끝내고 교실에 혼자 남은 영호는 나에게 꼬깃꼬깃 접은 작은 편지를 건넸다. 편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선생님, 공부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면 꼭 마음에 걸리는 아픈 손가락이 있다. 또래보다 조금 느리고, 조금 더 약한 존재. 하지만 일생 중 겨우 1년을 함께 보내는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단지 나와 함께 한 1년이 영호의 마음 속에 하나의 씨앗으로 자리 잡기를, 그 씨앗이 느리지만 착실히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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