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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하사색 May 25. 2023

당신의 엉뚱한 프로포즈

며칠 전, 열일곱 번째 결혼기념일이 지나갔다


  고등학생 때 나는 너무나 조용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이른 나이에 회사를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조금은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해서인지 학과 교수님을 대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며 어느새 내게도 넉살이란 게 생긴 걸까? 이쯤에서 한 번쯤은 고등학교 선생님들을 만나고 싶었다. 학창 시절 동안 스승의 은혜를 경험한 적은 몇 번 없었지만 그래도 그대들이 있어 내가 사회에 나와 잘 살고 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십여 년 전 5월의 어느 화창한 토요일, 동문회 주최로 스승의 날 행사를 준비하면서 그 친구를 만났다.

  졸업한 지 10년이나 된 모교가 한없이 어색한 나와는 달리 그 친구는 거침없고 적극적이었다.  

  학창 시절 하교 후 총각 선생님들의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생각하는 사제 간의 모습이 아니어서 이해가 안 됐지만 그런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에게는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대학교 교수님들보다 더 어색하고 어려운 존재인데 그 친구의 기억 속에는 친한 형과 함께 할 법한 추억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스승의 날 행사를 계기로 그 친구와 교제를 시작해서 1년이 되던 날 결혼을 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둔 그 해 스승의 날 행사는 선생님들을 친한 형처럼 생각하는 엉뚱한 남자친구의 깜짝 프로포즈로 끝을 맺었다.

  정식 일정을 다 마친 후 선생님과 동문들이 남아있는 자리에서 현수막까지 걸어두고 친구들을 동원해 깜짝 프로포즈를 했다. 나름 공식행사에서 개인적인 프로포즈라니, 나라면 감히 생각도 안 했을 텐데 말이다.

  미리 현수막을 제작하고 친한 친구들을 섭외해서 준비한, 섬세하진 않지만 나름 치밀했던 프로포즈에 이 사람과 살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다.

  



  며칠 전, 열일곱 번째 결혼기념일이 지나갔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의 일정과 상황을 더 신경 쓰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바쁜 일상에 치여, 신혼 때처럼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지만 건강하게 서로의 곁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스승의 날, 선생님과 동문들 앞에서 깜짝 프로포즈를 해줬던 남자친구는 교회에 결혼 기념 감사 제단 장식을 신청하는 남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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