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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진 Apr 12. 2024

인공지능과 공간 형성

인공지능 시대 건축 실천이 임해야 할 일들

인공지능 챗GPT가 연일 화제다. 미디어의 지면과 화면을 다 삼킬 태세다. 여태껏 기술에 비해 가히 변곡점에 해당한다니 호들갑 대신 제대로 들여다볼 이유는 있다. 이 신기술이 선사하는 놀라움 두 가지를 꼽으라면 지속성과 복합성이다. 


우선 오래된 친구 마냥 끝없이 대화를 막힘이 없이 이어갈 수 있다. 그에 보태어 영역의 제한 없이 복합적인 정보를 쏟아낸다. 지속성과 복합성은 이 기술의 특성으로만 그치진 않는다. 우리 살림살이에 큰 긴장을 가져다줄 게 뻔하다.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이 오고 난 후 바뀐 우리네 꼴을 복기해 보더라도 또 한 번의 변화는 피하기 어렵지 않을까.       


예의 텔레비전은 거실을 만들고 가족을 모이게 했다. 그 앞에서 식구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간식도 챙겼으며 텔레비전 내용을 감상했다. 그럼으로써 거실과 침실, 식사공간, 공부방은 기능별로 분리된다. 

이후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텔레비전이 나누었던 공간의 성격이 애매해지기 시작한다. 거실에 앉아서도 소셜 미디어로 가정 바깥과 연신 대화를 나누는 일이 상식 저럼 되었다. 침실에서 늦게까지 홀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일도 일상이 되었다. 텔레비전은 공간을 기능별로 나누었고, 이후 스마트폰은 나눠진 공간의 벽을 허물었던 셈이다.      


기능별로 격리되었다 허물어져 버린 공간의 대표적 예는 카페다. 과거 다방, 찻집, 커피하우스는 타자를 만나 차를 나누거나 홀로 자투리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카페는 그 같은 기능에다 공부하고, 와이파이를 통해 검색하며, 기기의 배터리를 충전하는 기능을 추가하였다. 


이른바 복합적 공간으로 바뀐 셈이다. 복합적인 삶의 꼴을 충족시켜 주는 공간이 되었다. 카페는 그런 점에서 스마트폰이 낳은 공간이되, 모두가 스마트 폰을 소지한 시대를 맞아 공간 중의 공간이 되고 있다.      

챗GPT와 같은 수단들이 일상화되는 시대엔 우리 주변의 공간이 어떻게 바뀔까. 이미 여러 기능을 한 데 묶은 복합공간이 대세인 지금 이후엔 어떤 공간 사건이 벌어질까. 우선은 복합공간의 복합성을 더욱 높여줄 것으로 예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인공지능을 통한 검색이나 대화의 결과물이 그림, 음악, 사물로 이어지게 하는 장치를 갖춘 공간의 탄생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한 번 더 접질려 보면 예상외의 공간 사건도 예상 가능하다. 복잡한 복합성을 갖춘 공간이 표준화되어 공간 간 차별성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공간의 표준화로 인해 공간의 다양성을 찾기가 힘들어질 전망이다. 모든 카페가 빠른 속도로 닮아가고 있음이 그 증거이기도 하다.        


표준화될수록 공간의 변주는 불가능해진다. 같은 크기, 같은 양식, 같은 장치를 갖는 공간은 개성 없는 대중 

행동으로 이어진다. 무개성의 공간 안에서 무개성의 대중이 무개 성한 행동을 만들어가는 표준 사회가 되고 만다. 텔레비전과 스마트폰 시대에도 공간이 표준화되어 개성이 사라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인공지능 시대에 이르면 공간의 무개성, 그 안 이용자의 무개성은 극대화된다.      


건축의 영역은 오래전부터 그 실용성과 함께 미적 가치를 고민해 왔다. 전에 비해 미약해지긴 했지만 미적 가치에 대한 담론은 건축에서 여전히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 이뤄질 건축과 인공지능 간 관계에서 미적 가치는 어떤 대접을 받을까. 


복합성의 실현을 위해 회생되는 개념이 되고 말까. 아니면 인공 지능이 가져올 일반화와 무개성의 재앙을 막아주는 해독제 역할을 할까. 희망컨대 건축이 오랫동안 힘들게 지켜온 미적 가치 고민은 인공지능 시대에 더욱 빛날 장치가 되었으면 한다.      

벌써부터 인공지능이 없앨 직업의 가지 수를 세는 선정적 소식들이 주목을 끌고 있다. 애써 무시할 수도 없지만 그를 광폭하게 살림살이에 끌어들여 효율성 제고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과욕도 견제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갈 공간을 제 방식대로 정리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란한 기술에만 현혹되었을 때 건축 분야가 놓치고 미적 가치는 우리의 논의 공간에서 아예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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