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둔촌주공아파트 건설 계획이 발표되었다. 원래 서민을 위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기획되었지만, 정부가 건설업체들의 자금난을 덜어주기 위해 도입한 주택상환사채로 인해 처음의 계획에서 다소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형식적인 서민아파트라는 비난을 뒤로하고, 둔촌주공아파트는 당시 잘 나가는 건축가였던 김정철 건축가의 손을 거쳐 멋진 아파트로 탄생했다.
삼 남매의 가족이 둔촌주공아파트로 이사 오게 된 건 그로부터 약 10년이 흐른 뒤인 1987년 겨울이었다. 그 해 봄, 삼 남매의 어머니는 야심 차게 계획했던 베란다 확장 공사를 망치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어머니는 공사가 끝나자마자 확장 비용까지 받아내어 집을 팔아버렸고, 몇 달 뒤 그 돈으로 이사 간 곳이 둔촌주공아파트였다.
막내아들은 빨리 이사를 한 덕분에 무사히 둔촌주공아파트 단지 안의 중학교에 배정받아 입학할 수 있었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들을 같은 동네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게 하기 위한 어머니의 과감한 결정이었다. 그 대신, 중3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던 둘째 딸은 갑작스러운 이사로 반에서 혼자만 다른 고등학교에 배정받아 통한의 눈물을 흘렸고, 고3이었던 첫째 딸은 부산스러운 집안 분위기 속에서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떨어졌다.
이사 간 새 집은 추웠다. 가스난로를 새로 장만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래도 삼 남매는 좋았다. 둔촌주공아파트는 무려 단지 안에 쇼핑센터가 있는, 그 동네에서 가장 평판이 좋은 아파트였다. 잠실에 살던 어린 시절, 둔촌동 YMCA 수영장을 오가며 구경하곤 하던 고급 아파트 단지에 살게 되니, 갑자기 좀 사는 집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이웃들도 꽤나 있는 집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삼 남매의 아버지는 변변한 직장이 없어 이따금 창피하긴 했지만, 어쨌든 간에 그런 사람들과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건 꽤나 목을 뻣뻣하게 만드는 일이긴 했다.
남편이 떳떳한 직업 없는 임대업자라는 건 삼 남매의 어머니에게 평생의 수치였다. 그런 어머니의 소원은, 내 자식 중 누구라도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교사나 교수, 그런 게 제일 좋아 보였다. 다행히도 욕심 많은 어머니 밑의 삼 남매는 어머니의 기준을 그런대로 충족하는 어른들로 자랐다. 한차례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대학에 들어간 첫째 딸은 어느덧 대학에서 강의씩이나 하는 대학원생이 되었고, 학창 시절 어머니의 속을 꽤나 썩이던 둘째 딸은 음대에 들어가 우아한 피아노 선생님이 됐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공부 잘하던 막내아들은 드디어 ‘서울대생’이 됐다.
삼 남매의 어머니는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비록 남편은 변변찮았어도 자식 농사만큼은 누구보다 잘 지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기세가 등등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아까운 줄 모르고 백화점 옷을 사 입혔고, 고기를 먹여야 한다는 일념 하에 주말이면 최고의 쇼핑센터인 한양쇼핑센터에 데려가 돈가스를 사 먹였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삼 남매는 풍족하게 자랐다. 아버지가 제대로 된 직장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도, 사는 데 부족함 없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삼 남매는 사는 곳에 불만이라곤 없었다. 한 번도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87년에 둔촌동으로 이사 갈 즈음, 1년 뒤의 올림픽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달아오른 올림픽 분위기의 중심이 바로 둔촌동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등굣길에 매일 오고 가던 똥냄새나는 몽촌 토성이 자고 일어나니 올림픽 공원이 되어 있었고,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에 어느 날 갑자기 롯데월드가 생겼다. 둔촌아파트 바로 옆, 올림픽을 위해 새로 지은 올림픽 아파트 안에 처음 들어온 ‘세븐일레븐’이라는 가게는 24시간 내내 한다기에 깜짝 놀랐고, 일반인이 전문 운동 시설에서 운동을 한다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삼 남매의 집 앞에는 헬스장이 있었다.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게 최고였던 시절, 그들은 그러고 살았다. 비록 강남의 한 복판은 아니었지만, 그 언저리에서 강남의 분위기를 느끼며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유년 시절에는 ‘아, 우리 꽤나 잘 사는 집인가 봐’, 착각하고 살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그간 그런 것들을 누릴 만큼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삼 남매가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 건, 그들이 이미 어른이 된 뒤였고, 너무 늦은 후였다.
본격적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건 삼 남매가 고등학교 다니던 80년대 말, 그들의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사기를 당하면서부터였지만, 사실 그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부자 할아버지 밑의 무능력한 삼 형제, 그 형제들이 성인이 되고 가정을 꾸린 뒤에도 계속해서 아버지의 건물 한 채에만 의지해 살았던 것이 문제였다.
집안의 기둥이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얼떨결에 건물의 모든 운영권을 갖게 된 삼 남매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든든한 가장이라기보단 맘씨 좋은 한량이었던 아버지는 당신의 식솔보다 사이가 틀어진 지 오래인 형제들의 형편을 먼저 살폈다. 아이들이 점점 커가며 들어가는 돈은 많아지는데, imf가 터진 뒤로는 따박따박 잘만 들어오던 가겟세마저 제때 들어오지 않기 시작해 조금이지만 빚도 져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맘씨 좋은 아버지는 그 짐을 홀로 끌어안고 해결해보려 애쓰다가, 결국 병이 들고 말았다. 큰아버지는 병석에 누운 아버지에게 ‘부모 재산 다 탕진한 놈’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건물을 빼앗아가려 했고, 아버지는 “너흰 셋 다 대학 나왔지만 형네 자식들은 다들 못배웠으니 먹고 살기 막막할 거다”, 마음 편한 소리를 하시며 조카들에게 건물을 넘기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고, 삼 남매와 어머니는 빈 손으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일평생 남편의 무능함에 진저리 쳤던 어머니는 결국 마지막까지 두 손 놓고 모든 걸 빼앗기는 남편을 보며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뼈에 사무치게 느꼈다. 그리고 내 자식들은 그렇게 살게 하지 말아야지, 다시 한번 다짐했다. 빈털터리로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어도 빚은 한 푼도 지지 않았고, 자식들이 공부를 끝마치고 일할 수 있도록 끝까지 뒷바라지했다.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삼 형제와는 달리 삼 남매는 모두 각자 먹고살 길을 찾게 되었으니, 전세대의 과오로부터 배운 점도 없진 않은 셈이다.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었다. 가세가 기울며 삼 남매를 옥죄어 온 위기감과 좌절감은, 감히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뒤에도 옹기종기 모여 살던 삼 남매는 그렇게 각자 살 길을 찾아 쫓겨나듯 서울을 떠나야만 했다. 20년 넘는 서울 살이가 무색하게, 모든 게 너무나도 금방 이루어졌다.
2000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함과 동시에 서울 토박이 가족은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