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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BEL Sep 26. 2020

[영화 리뷰] 아무도 모른다

선의 부재

무기력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나는 무기력하다.

명세서에 그려지는 아이들의 동심 어린 그림과

주린 배를 인스턴트로 채우면서 짓는 천진한 미소에

나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영화의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본래 다큐멘터리 연출을 하던 사람이다.

그런 이유인지 아이들의 현실은 참혹하기 그지없지만 극도로 절제되어 관객에게 전달된다.

먼발치에서 아이들을 관찰하는 듯 잡아내는 촬영 방식은 관객이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장면을 끊임없이 사고하게 한다.

또 순간 나타나는 몇 마디 되지도 않는 대사와 정적인 표정에 담긴 비극은 관객의 마음을 그야말로 후벼 판다.

이처럼 역설적이고 정제된 연출을 통해 감독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한 것인가

나는 무기력함과 동시에 커다란 책임감을 느꼈다.

앞 뒤가 안 맞는 말 같지만 정말 그랬다.

전자의 무기력함은 아마도 분노의 화살을 돌릴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찾아보자면 후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가장 악인에 근접한 인물들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악인 됨은 그 자체로 선명한 악행이 아닌 책임감의 부족함에서 오는 흐릿한 악행에서 비롯되기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악이 선에 대칭되는 개념이 아니라 선이 부재할 때 출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봤을 때, 그들이 가장 악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들만 악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어른, 영화를 보는 관객들 그리고 나아가 나 또한

앞서 언급한 부모들이 가졌어야 할 그 책임, 그 악함, 그 선의 부재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저마다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책임이 있다.

이러한 감상은 앞서 언급한 영화의 연출적 기법과 더불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어른들의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손찌검하지도 욕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들은 아키라 앞에서 한심한 말을 해대면서도 푼돈이나마 손에 쥐어준다.

편의점 직원은 아이들에게 폐기된 음식을 건네주고

집주인은 밀린 집세에도 아이들을 다그치거나 내쫓지 않고 그대로 살게 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방치된 채 불결한 환경에서 굶고 상처 받다 결국 목숨을 잃는다.

나는 이들 중 누구에게 돌을 던져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몹시 무기력하고 공허한 분노가 든다.

그리고 자문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나의 대답은 나 또한 마찬가지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느낀 커다란 책임감이었다.

감독의 의도 역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히로카즈는 절제된 감정으로 비극을 그 자체로 영화의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와 함께 나아갈 방향성까지 제시해준다.

영화는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이란 88년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사실 실제 사건의 참담함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 이상이다.

그러나 그런 참담함 가운데 일부만을 영화에 억눌러 담아냄으로써 감독은 이를 단순한 사회적 파장이 아닌 사회적 울림으로 만들어냈다.

영화를 보며 이런 것이 영화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역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론가 이동진은 좋은 영화란 극장 밖에서 시작되는 영화라 말하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그 예로 들었다.

나는 그 말이 참 공감 갔다.

빛이 있을 때 어둠은 사라진다.

나와 같은 작은 불빛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싶겠지만 조금만 더 힘 내보자.

그 작은 온기에 기대어 누군가는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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