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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BEL Jul 26. 2020

[영화 리뷰] 위플래쉬

당신에게 예술은 무엇인가?


영화는 내게 예술적 성취와 이를 위한 희생의 가치를 저울질하게 했다.

그리고 이 고민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내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예술에 대한 각자의 가치관이 있다.

주인공 네이먼은 스스로의 가치와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동일시한다.


교내 최고의 스튜디오 밴드 일원이 되었을 때

평상시 눈 조차 마주치지 못하던 짝사랑 니콜과 데이트 약속을 잡고

또 친척과의 식사 자리에서 삼촌이 음악으론 밥 벌어먹기 힘들다며 자신이 동경하던 찰리 파커까지 무시하자

흥분하여 사촌들에게 상처되는 말을 내뱉는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가 자신과 자신의 음악적, 예술적 성취를 얼마나 동일시하는지 보여준다.


플레처 교수는 네이먼 보다 더 극단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예술이 사람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학생들의 음악적 성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잔인한 발언과 가학적 행동을 일삼고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패배자 취급한다.

또 교수직 해임 후 증언에 대한 원한으로 네이먼을 카네기홀 연주의 드러머로 불러내

연습하지 않은 곡을 연주시켜 그의 음악 인생을 완전히 망치려 하다가도

(심지어 이것은 본인의 연주이기도 하다. 그의 음악에 대한 완벽주의 성향을 고려할 때 원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네이먼이 음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이란 것을 고려할 때 나는 이것이 일종의 살인미수라고 본다.)

네이먼이 광기에 휩싸여 드럼을 치는 모습에 만족하며 그와 호흡을 맞춰 곡을 마무리한다.

플레처 교수의 이런 모습을 통해 그가 음악을 타인은 물론 자신의 안위와 감정, 즉 스스로 보다도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외, 아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음악을 제대로 된 진로로 인정하지 않는 네이먼의 아버지와 음악은 주관적인 것인데 어떻게 우열을 가르냐는 네이먼의 사촌 등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제각기 다른 관점에서 음악의 가치를 매긴다.

그리고 나 역시 고민에 빠졌다, 내게 음악이란 또 예술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나는 처음 영화를 보고 난 뒤 굉장히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이들은 마지막 10여분의 시퀀스에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는데

난 오히려 그 부분이 가장 보기 힘들었다.

분명 대단한 연주였고 훌륭한 연출임에도 나는 견디기 어려웠다.

왜 그랬던 걸까?

내 불편한 감상의 이유는 영화의 결말이 나의 가치관에 너무나 안 맞기 때문이었다.

내게 음악은 또 예술은 그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다.

나는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며 그에 대해 얘기하길 좋아하지만

이것은 나는 물론 그 누구보다도 앞설 수는 없으며,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을 돌이켜보자.

카네기홀에서의 첫 곡을 망친 뒤 네이먼은 좌절하여 아버지 품에 안기지만 이내 투지를 불살라 다시 드럼 앞에 선다.

그리고 항상 플레처의 템포에 따랐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박자로 연주를 시작하여

밴드를, 플레처를, 관객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네이먼이 드디어 플레처에게 휘둘리는 아이에서

자신의 음악을 하는 뮤지션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비록 자신과 음악을 동일시하는 기존의 입장이 바뀔지는 미지수지만

그 정도는 내 가치관에서 허용 범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결말이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곡이 진행될수록 영화는 내 바람과 엇나가기 시작했다.

점점 광기에 휩싸이는 네이먼의 연주와 그걸 바라보는 아버지의 굳은 얼굴 또 그와 상반되는 플레처의 상기된 표정.

곡의 말미에서 네이먼은 플레처의 인정하는 눈빛에 미소 짓고 그의 지휘에 맞춰 연주를 마무리한다.

그렇다. 그는 결국 플레처 교수법의 산증인 즉, 제2의 션 케이시가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열린 결말이라는 식으로 영화를 평하지만


내게는 명백히 닫힌 그리고 안타까운 결말이었다.

플레처는 네이먼의 성취를 가리키며 자신의 폭력적 교수법을 합리화할 것이며

션 케이시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던 것처럼 네이먼 역시 그의 전철을 밟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이러한 결말은 예술을 삶의 자양제로 여기는 내게 너무나 비극적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나아가 한 명의 개인을 죽음으로 내몰 정도로 예술이 가치가 있는가

감독은 이처럼 잔인한 결말을 통해 내게 예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 줬다.

데미언 샤젤은 이후 라라랜드, 퍼스트맨 등에서도 비슷한 플롯의 고민을 다뤘다.

주인공이 자신의 목표를 위해 무엇을 어디까지 희생시킬 수 있는가라는

공통적 주제 의식은 관객에게 예술과 직업적 성취 그리고 인생에 대한 저울질을 하게 한다.

결론을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영화를 본 이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만드는 감독의 연출은 매우 정교하다.

당신에게 예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해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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