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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BEL Aug 09. 2020

[영화 리뷰] 죽은 시인의 사회 (2)

‘거울’을 상징하는 시

이 영화에서 시가 상징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지난 리뷰에서 언급했었다.

오늘은 그때 다루지 못했던 시의 상징, ‘거울’로써의 시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일상에서 거울이란 무언가를 반사하여 보여주는 용도로 쓰인다.

이러한 거울의 속성과 같이 이 영화에선 시가 무언가를 비춘다.

시는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인물을 통해 읽히며 이를 통해 순간의 의미, 인물의 감정과 가치관의 변화 그리고 그들의 미래까지 비춰주는 역할을 한다.

오늘 리뷰에선 영화에 인용된 시들 중 내게 인상 깊었던 작품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재밌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첫 번째로 다뤄볼 시는 월트 휘트먼의 ‘O Captain! My Captain!’이다.

시를 소개하기 앞서 시의 원래 주인인 월트 휘트먼에 대해 소개해보려 한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시의 원작자를 찾아보면 영화의 주제 의식과 부합되는 인물들이 많은데 월트 휘트먼 역시 그렇다.

그는 미국의 시인으로 이른바 자유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인데 자유시라는 것이 일정한 운율과 규칙을 바탕으로 한 정형시와 반대로 자유로운 표현으로 화자의 감정을 노래한 것이란 사실을 고려했을 때, 영화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자유를 강조하기 위한 디테일이라 생각된다.

인물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마치고 이제 시를 살펴보자.

- O Captain! My Captain! -

아 선장! 나의 선장이시여! 섬뜩한 항해는 끝이 났고,
배는 모든 고난을 견뎌내었으며 우리가 찾던 보배 또한 얻어냈습니다.
종소리는 들려오고 항구에는 들어가며 사람들은 들떠듭니다.
굳건한 용골과 완강하며 담대한 선척을 눈으로 좇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아 가슴이 가슴은 가슴엔!
선장께선 싸늘히, 죽음에 쓰러지셔,
그가 누우신 그 갑판 위에는,
아, 떨궈지는 붉은 방울방울이.
아 선장! 나의 선장이시여! 일어나시어 종소리를 들으십사,
일어나시어, 당신을 위해 깃발은 나부끼고 나팔을 울리니,
당신을 위해 꽃과 매듭으로 화관이, 해안가의 무리가 지어졌고,
당신을 위해 그들이 부르고 다 함께 손 흔들며, 열렬한 면면들이 요동치오니,
자 선장님! 친애하는 어버이시여!
이 팔로 당신 머리를 받치우나,
그것은 갑판 위의 덧없는 꿈.
당신께선 이미 싸늘히, 죽음에 쓰러지셨네.

나의 선장께선 대답치 않으시고 그의 입술은 창백하며 미동조차 없으시니,
나의 어버이는 내 팔에 반응 없고 맥박도, 의식도 없으시다,
배는 탈 없게 무사히 닻 내리고 그 항해는 다다라 끝나며,
섬뜩한 항해서 승리한 배는 얻어낸 전리품과 함께 돌아온다.

해안가여, 환호하라! 쇠북이여, 울리거라!
해도 나는 비애에 젖은 발걸음으로,
선장께서 싸늘히, 죽음에 쓰러지셔,
누우신 그 갑판 위를 거니르리라.

시의 내용을 요약하면 힘겨웠던 항해 끝에 갖은 보배를 가지고 배가 돌아와 사람들이 환호하지만 항해의 주역인 선장은 목숨을 잃어 싸늘히 누워있다는 내용이다.

겉으로 보기엔 선장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 같겠지만 사실 이 시는 휘트먼이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이 암살당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지은 추모시다.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대통령직을 수행하여 북군을 승리로 이끌어냈지만 종전 직후 암살 당해 생을 마감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 왜 키팅은 학생들에게 자신을 ‘오 캡틴, 마이 캡틴’이라고 부르게 했었을까?

나는 이것이 영화의 결말을 미리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말에서 토드는 떠나는 키팅을 위해 책상 위에 서서 ‘오 캡틴, 마이 캡틴’이라고 그를 불러 세우고 이에 용기를 얻은 다른 제자들 역시 토드와 마찬가지로 책상 위로 올라가 키팅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이전 리뷰에서 언급했든 키팅은 학생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일깨워주고자 노력했고, 이러한 연출은 그의 바람대로 마침내 학생들이 자유로운 사색가로 거듭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키팅은 닐의 자살에 대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학교를 떠나게 된다.

키팅의 이러한 모습은 휘트먼의 시에서 나온 선장 즉, 링컨의 모습과 겹치는데 영화의 초반부부터 학생들에게 자신을 ‘오 캡틴, 마이 캡틴’이라고 부르게 했던 것을 고려해보면 결국 이는 영화의 결말을 미리 보여주는 연출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면에 대한 설명을 조금 보태자면,

이때 일어난 학생들과 앉아있는 학생들이 뒤섞여 있는 연출은 학생들이 진실로 자율적인 의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미장센이다.

특히나 키팅이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서서 보는 것이 대상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보라는 뜻에서 했음을 고려하면 이는 학생들이 떠나는 키팅을 닐의 자살에 대한 책임자가 아닌 다른 의미로 평가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다음으로 다뤄볼 것은 키팅의 자작시다.

학생들이 키팅의 지시에 따라 책을 찢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 동료 교사가 이후 식사 자리에서 키팅에게 교육 방향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때 동료 교사가 하는 말에 키팅은 자작시로 응수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료: 몽상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보여준다면 나는 만족할 거요

키팅: 하지만 진정한 자유란 그들의 꿈에서만 가능합니다. 항상 그러했고 항상 그럴 것입니다.

나는 영화를 본 뒤 키팅의 자작시가 어쩌면 닐의 미래에 대한 예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닐의 죽음을 보며 그가 꿈을 향한 자유를 쫓았지만 현실에 끝내 맞서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통해서 해방을 맞은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작시의 꿈이라는 시어를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가정한다면 이 구절을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었던 닐의 자유가 죽음의 세계에서 비로소 실현될 것이라는 결말에 대한 예언, 즉 아무리 애쓰더라도 결국 진정한 자유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굉장히 염세적인 해석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자작시를 적극적 자유로 한정하여 해석하는 것이 장면의 분위기 상 더 자연스러운 건 사실이고 실제로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이해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봤을 때부턴 닐의 자살이 충격이었던 건지 시에서의 꿈이 나는 계속 죽음으로만 읽힌다.

닐은 비록 가공의 인물이지만 오늘날 우리 세대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몹시 안타까운 결말이다.

마지막으로 다룰 것은 헨리 소로의 시다.

헨리 소로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한 미국의 작가이자 사상가이다.

영화에서 인용된 그의 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사상을 조금 설명해보겠다.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잡아 가두는 정부 밑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어야 할 곳은 감옥이다.’

위 구절은 그의 수필 ‘시민의 불복종’의 일부로 그의 사상을 잘 요약해준다.

그는 그의 수필에서 국가 또는 지배계층의 정책과 법률이 부당하거나 도덕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고 판단된다면, 개인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이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소로의 사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영화를 관람한다면 영화의 연출적 의미 역시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시를 소개하겠다.

영화에 인용된 소로의 시는 아이들의 문학 교과서 앞장에 적혀있던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진정한 삶을 위해 숲 속으로 갔다. 심사숙고하여 삶의 정수를 깊이 빨아들이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을 모두 떨치고 삶이 다했을 때 내 삶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 시는 영화에서 총 두 번 등장하며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재결성하기 위해 아이들이 처음으로 학교를 빠져나와 인디언 동굴로 향하는 장면이다.

이때의 시는 권위에 짓눌린 삶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묘사해주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의 의의를 설명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두 번째로 등장한 것은 닐의 자살 이후 키팅이 그의 책상에서 교과서를 발견해 읽는 장면에서 나온다.

이때 시의 의미는 앞서 설명했던 키팅의 자작시에 대한 나의 해석과 같은 의미 즉, 닐이 비록 현실에서는 실패했으나 죽음을 통하여 진정한 삶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암시하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 리뷰를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던 중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할만한 자료를 찾았다.

영화를 원작으로 한 소설에서 키팅은 ‘죽은 시인의 사회’ 모임의 이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건 단지 조직에 가입하려면 누구든 죽어야만 한다는 뜻이었지.
살아 있는 사람은 정회원이 아니었어 정회원이 되려면 일생동안 준회원 노릇을 해야 했지.’

이런 키팅의 말을 나의 해석과 종합해보면 닐은 아마도 죽음을 통해서,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는 죽음을 통해야만 진정 자유로운 삶 다시 말해 시인이 될 수 있다는 해석까지 확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안타까운 결말이다.

오늘 리뷰에선 다루지 못했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외에도 많은 시들이 등장하며 각각 무언가를 비춰 마치 ‘거울’과 같이 기능한다.

아직 영화를 못 본 분들, 그리고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은 분들이 이런 영화적 장치에 관심을 기울여본다면 더욱 풍성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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