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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Nov 07. 2023

하루키 "토니 다키타니"

토니 다키타니를 위한 구원


늦은 아침을 먹고 나자 그녀가 뒷정리를 시작했다. 그녀가 신경 쓰지 않도록 나는 주방에서 벗어나 빨래거리를 들고 움직였다.



세탁기를 돌리고 건조기에서 옷을 꺼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다시 식탁에 와 보니 그녀가 블루투스 키보드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은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식탁 앞에 나타난 나의 그림자를 알아채고는 눈짓으로 도와달라는 요청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블루투스 키보드와 핸드폰을 서로 연결시켜 주고 턱을 괴고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핸드폰의 작은 화면에 몰입한 채 연신 키보드를 눌러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음악 한 곡을 틀기 시작했다. 아마도 글을 쓰기 위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흘러나오는 음악을 수동적으로 들으며 나도 무언가를 쓰기로 했다. 그런데 어떤 멜로디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을 때 나는 글쓰기를 멈춰 버렸다. 음악이 귀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나는 놀란 기색으로 지금 흘러나오는 곡은 과연 어떤 음악이냐고 물어보았다. 이렇게 물어보면서도 스피커를 통해 식탁 주위로 쏟아지고 있던 멜로디의 감미로움에 감화된 나머지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에 눈 떠서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바로 이 음악을 들은 일"이라고.



내 말뜻을 알아차린 그녀는 나의 음악적 취향을 꿰뚫어 보는 듯 멜로디의 특색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조로운 듯하지만 웅장한 느낌이 드는 음악을 좋아하나 봐?"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글은 주로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데다가 때로는 추상적인 낱말까지 동원해 감정을 배제한 채 의미 없는 문장을 나열하곤 했었다. 그런 낱말과 문장들 사이에서 숨어 있던 나의 감정을 모두 추론해 낸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음악에 한참 빠져 있었는데 어느새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은 그녀가 핸드폰을 닫으며 일어섰다. 토니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입을 그려낸 글은 역시나 그녀 다운 관점을 담아내고 있었다.



쭉 훑어보고 난 뒤 다시 위로 올라가 문장 하나하나를 새롭게 읽었다. 어쩜 이렇게 토니의 감수성에 잘 동화되었는지 그녀의 독서법이 궁금해졌다.



이윽고 토니에 대한 발제문을 바탕으로 대화를 나눴던 그날 아침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하루키 단편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솔직히 나는 이 단편에서 찾아낸 새로운 의미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나는 토니의 행동들이라든가 생각들이 너무도 당연하게만 여겨져서 특별히 얘기할 거리도 찾아내지 못했을 정도예요."



나는 그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감상을 쏟아붓기만 했었다. 그래서 그녀의 입에서 그 이유를 듣기 전까지 나는 다키타니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할 정도로 이야기에 무감각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그 이유를, 내가 그토록 무감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그 이유를 듣고 나서 나는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더없이 소중해졌다.



평생을 폭포 옆에 살아온 나머지 폭포가 쏟아내는 굉음이 들리지 않는 사람의 입장이었던 나는 새로운 관점을 부여해 주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간결하고 쉬운 문장 덕분에 가독성이 좋은 작품에 대한 편협한 나의 시선을 발견했고 이윽고 부끄러워졌다. 그 부끄러움은 마음속으로만 표출했다.



묵묵히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구원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토니의 아내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다음 그의 삶에는 어떤 구원이 가능할까에 대해 고민했다.



구원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 얘기로 이어질 것만 같지만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별것도 아니다. 그의 삶에 한 줄기 따듯한 햇살을 내려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라고.



인간은 미래를 미리 상상해서 자신의 행위에 반영하지 못한다. 아내의 중독 증세를 교정하려고 했던 토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 누가 미리 알 수 있었을까? 자신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그 말은 결국 부메랑과 같았다.



결국 그는 예전처럼 혼자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과연 구원의 손길이 전해질 수 있을까?



오르테가는 구원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주어진 현실이 의미의 충만함을 지니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을 받는다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어렵게 결혼했지만 과오가 아닐 줄 알았던 자신의 말 한마디가 결국 자신을 다시 고독의 성탑으로 밀어 넣었다. 토니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아내가 남기고 간 옷가지와 아버지의 유물을 정리하면서 더 깊은 고립감에 빠졌을 것이다. 드레스룸 안에서 마음속으로 울부짖고 있을 그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를 사로잡은 깊은 상실감과 적막감은 주어진 현실에서 의미의 충만함을 다른 방식으로 채워줄 것이다. 만일 그가 다시 한번 삶의 달콤한 축복을 맛볼 기회를 갖고자 용기를 낸다면.



그래서 나는 그에게 깊이 슬퍼하고 멀리 바라보며 현실을 관조할 수 있기를 바랐다. 주어진 현실이 현상에 그친 의미의 충만함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반동작용으로 구원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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