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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Oct 09. 2023

한뼘사이(2): 가까이





어떤 거창한 작업 앞에서는 초기의 활력과 다르게 중간 과정에서 움츠러들 때가 간혹 있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걸작의 비밀을 파헤치려고 시도한다면 특히 그러한 무력감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특히 나처럼 재주가 부족한 인간은 꿰뚫어 보는 능력이 변변치 않아 힘이 부치는 때가 자주 있다. 그래서 희극 "한뼘사이"의 미학적 비밀에 침투하려고 할 때 어떤 벽을 마주 보는 것만 같다. 그런 나는 1편에 이어 이 글을 작성하는 데에 상당히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저 멀리 떠나버린 버스의 뒷모습 같은 지적인 희열을 쫓는 데에는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버스가 멀어졌을 때 더 붙잡고 싶어지는 것처럼 웃고 떠드는 사이사이에 찾아드는 적막감처럼 연극과 멀어짐으로써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예술적 가치의 단서라든가 흔적을 뒤쫓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 연극이 오랫동안 무대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어떤 시대적인 생명력을 작품 속에 품고 있을 거라는 희미한 기대감을 느꼈다. 대중예술이라고 해서 순수예술과 다른 인간적 주제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한때는 대중예술을 가리지 않고 멀리 했었다. 그래서 대중이 열렬히 환호하는 작품에 대해서 모두 무관심했다. 심지어는 베스트셀러조차도 읽기를 거부했었다.



그런 나에게 지적 완고함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나와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고상한 정신의 피를 내 혈관에 주입시키고 그들의 숨결이 내 맥박 하나하나에 스며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느덧 그들의 어깨 위에 앉아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다시금 세상에 침투해 함께함으로써 동시대적 숨결에 공감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여기까지 이르자 드디어 나는 오르테가의 희망사항처럼 모든 사물의 애인이 되고 싶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몇 해 전부터 나는 사물의 재판관 노릇이 하기 싫어졌다.



나는 사물의 친구이자 연인이 되고 싶을 뿐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물을 이해하고 가슴으로 품어 이 세계가 주는 커다란 기쁨을 최대한도로 누리고 싶다.



실제의 사물은 물질과 에너지로 구성된다. 이에 반해 예술적 사물은 문체라는 실체를 통해 개별적인 생명력을 얻게 된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하나의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고 할 때 우리는 작가나 화가의 시선과 눈을 마주쳐야만 한다. 독서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연극이라는 작품도 마지막 무대가 커튼 뒤로 사라질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극작가가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에 근접하려고 시도하는 우리의 작업이 완료될 때 완성되는 것이다.



연극 한뼘사이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했던 희극의 요소를 빠짐없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작업은 지난한 과정이었다. 굳이 이러한 시도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내게 다가온 장면이 있었다. 나의 20대와 현세대의 시대적 배경이라든가 사회적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의 20대는 손끝만 닿아도 터질 것 같은 원한의 시대로 점철되었다. 그래서 다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거리 위를 살금살금 배회했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흘러갔다. 그 사이에 미국이 금융위기를 겪었고, 그 혼란을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 정리했다.



그러나 미국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였다. 백인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신흥산업국에서 뺏어가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백인 노동자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트럼프가 보호무역이라는 깃발을 들고 미국을 점령했다. 결국 미국도 자국이익의 최우선이라는 기치 아래 심리적 폐쇄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들도 결국 원한에 사무치게 된 셈이었다.



다행스럽게 우리나라는 그 뒤로 경제가 꽤나 회복되었다.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 시대를 열어젖혔고 K-pop의 전 세계적 대유행과 함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이류국가에서 일류국가로 나아가는 주춧돌에 올라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부적으로 보자면 우리나라의 청년 실업률은 10%를 넘기면서 미래성장동력이 그 속도를 잃기 시작했다. 20대들에게는 희망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이들은 우리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연극 "한뼘사이"를 보는 동안 젊은이들의 희망찬 시선과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이 연극은 5인극으로 연출된다. 301호부터 304호까지의 남녀 네 명의 주민들이 펼쳐나가는 좌충우돌러브스토리이다.



네 명의 주민 중에서 유독 한 명은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언제든 잽싸게 이기적으로 몸을 움직여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젊은이다.



급기야 그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옆집 아가씨에게 몹쓸 짓을 하라는 강압을 받게 된다. 대신에 법률적으로 변제의 의무가 없는 빚을 없는 셈 쳐준다는 은밀한 제안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덕적 정신을 발휘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켰다. 어찌 보면 너무 뻔한 결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현세대에 우리가 걸어도 되는 한줄기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도덕적 심판관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물질적 풍요를 획득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지 몰라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이르자 미덕의 정신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젊은이들의 의젓한 정신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20년 전 우리는 세상을 심판하려고 했던 도처에 숨겨진 예민한 눈빛에 벌벌 떨던 시기를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는 드디어 그러한 시대상에서 탈피했다.



그래서 그들은 도덕을 자신의 가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으로 삼았을 뿐 타인을 심판대에 오르게 하는 무기로 쓰지 않았다.



이 얼마나 활력이 넘치는 사회의 모습인가? 아마도 우리는 개인주의가 대중들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했을 때 개인주의가 얼마나 우리를 사로잡을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20세기 초의 지식인과 같은 입장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젊은이들에 대해 더 이상 우리가 점잖은 척, 어른의 자세를 취해 그들을 진리로 인도해야 한다는 환각적 견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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