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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Oct 09. 2023

연극 한 뼘 사이(1): 멀리서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하고 시간이 쏜살처럼 흘러가기 시작했을 때 친구들이 하나둘씩 군입대를 하기 시작했다. 그즈음에 이중국적이었던 유명 가수의 해외도피 행각은 상당한 이슈로 회자되곤 했었다.


더군다나 유명인의 도피행각이 발생하기 전, 우리나라는 수입대금을 결제할 외화가 부족해 국제금융기관의 문을 두드려 대출을 받았다. 그것도 매우 굴욕적인 조건으로.


이때 IMF가 우리나라 정부에게 부과한 대출 조건은 각계각층에게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 분위기가 극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생계의 최전선에서 총성 없이 날아온 총알에 맞아 쓰러진 한 나라의 가장이 수만 명을 넘어섰다.


울분을 삭이고 있던 군중은 억울한 심정이 극에 달아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손 끝으로 툭 건들기만 해도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화통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하루하루 버텨 나가는 시간이 길어지자 군중의 가슴은 증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가슴속에 자리 잡은 증오는 사물들과 연결되어 있던 사슬을 끊어버렸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세계가 주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향유하기보다는 도덕적 잣대를 날카롭게 세워 사람들을 재단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맨몸으로 맞서 헤쳐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죄밖에 없었다. 그들은 남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억울하게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생계의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삶의 모습은 단순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삶의 양태를 단순화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도덕적 교리라는 우산 아래에 숨어버렸고 마음속에 품은 증오는 원한으로 훌쩍 커버렸다.



그 뒤로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악의적인 것들도 많았고 때로는 희극적인 요소를 아끼지 않은 패러디를 통해 서글픈 웃음을 만인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당시 그들은 오인용이라는 말로 자신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 뼘 사이는 오인극이었다.


오인용과 오인극 사이에는 오인이라는 공통점밖에 없는 것인가? 과연 그뿐이란 말인가?


그것뿐인데도 이 시간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엘스테르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한뼘사이는 정말로 유쾌한 단만극이다. 단막극일 수밖에 없는 플롯으로 구성된 희극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20세기의 희극인이 21세기의 한국인에게 서글픈 메시지를 남겨준 것이다. 우리가 겪어나갈 삶의 고통을 그들은 100년 전에 앞서서 거쳐갔다.



약자인 우리들이 강자에 대한 원한을 풀어낼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은 바로 도덕적 교리에 의지할 때다. 이러한 도덕적 교리를 통한 존재의 부활을 노래한 희극이 바로 한뼘사이였다.



나의 이러한 감상평이 무르익는 데에는 여전히 작품과의 거리두기가 유효했다. 



도박에 삐져 막장 인생을 살아가는 20대가 사랑이라는 지고지순한 가치를 지키고자 선량한 마음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추구했다.



내가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는데 히틀러 같은 희대의 정신병자조차도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질병을 겪고 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선량하게 태어났다.



인간의 원죄는 종교가 뒤집어 씌운 것일 뿐 갓난아이는 모두 선량하다. 



따라서 도박에 중독된 인간은 비록 하층민의 삶 속에서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지라도 그는 인격적 존재였다.



그는 우리와 동일한 정의와 도덕적 정신을 갖춘 의젓한 인간이다.



그래서 그가 이해타산적 선택을 뿌리치고 사랑을 불태울 때 열호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열렬히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양심을 지킴으로써 왜곡된 분배정책에 편승한 사회의 기득권층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과자는 담당 검사가 던진 부케를 무표정으로 받아내고 자신의 연인에게 부드럽고 달콤한 키스를 전해줄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인간적인 마음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이러한 도덕적 가치를 간파했던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르상티망을 설파했다. 비록 키에르케고르가 처음 말한 르상티망일지라도 그것의 속성을 파헤친 이가 바로 니체였다.


강자에 대한 원한을 풀어낼 때 도덕을 무기로 사용하는 현명함을 보여준 그들을 대변해 준 이가 바로 니체였다.


다만 우리는 고상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 덕분에 우리 손에 들고 있는 도덕적 정신은 훨씬 복잡하고 섬세하고 투명해졌다.


한번 구축된 도덕률을 기계적으로 준수하는 것보다 어떤 상황에 도덕적 판단을 가하기 위해 선의라는 도덕적 진실과 견주기를 게을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진실된 미덕을 향한 가치지향적 삶을 추구하자. 필멸의 존재는 그럼으로써 불멸을 꿈꾼다.


그게 필멸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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