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각형 Oct 01. 2023

작가의 시선

이해에 관하여


모르긴 해도 세속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작가가 작품을 내놓을 때 가장 기대하는 것은 판매부수가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독자일 것이다.



거드름 피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글이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에 혈안이 되어 있을 테지만, 진정한 작가라면 가슴속에 맺혀 있던 이야기들을 세상에 풀어놓았을 때 누군가 단 한 명은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이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작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서로 떨어져 있어 전화 통화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바닷가를 수화기 너머로 도시에 있는 연인에게 정감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하얀 갈매기 서넛이 날개를 펼친 채 바람을 타고 있는 해변에서 자신을 향해 돌진하던 파도가 발 앞에 하얀 포말을 살며시 놓고 뒷걸음질 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애정을 담아 묘사한 바닷가 풍경과 함께 연인은 귓속으로 들려오는 우와 하는 함성 같은 파도소리에 자신의 마음을 띄워 연인에게 보낸다. 이토록 애정 어린 이야기를 비밀스럽게 속삭이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두 사람의 마음에는 공허와 아쉬움이 숨어 있다.



함께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연인의 마음속에 누렇게 해변을 적시는 바닷물처럼 헛헛한 마음으로 스며든다.



도시에 있는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현재 바다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바다 앞에서 행복하다는 것도, 그러한 행복을 자신에게도 전해 똑같이 행복해지라고 축복을 전하는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도 도시에 있는 이는 바다 앞에 서 있는 연인을 이해하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설령 바닷바람이 품고 있는 습기, 해변 위로 쏟아져 내리는 일조량 그리고 지역의 기온을 모두 알고 있다고 한들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알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해는 알고 있다는 사실을 넘어선 무엇이다.



(정치)경제학의 창시자의 이름은 우연하게도 최초의 인간의 이름과 같다. 아담은 자신의 저서에서 인간은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라며, 근대의 합리성을 찬양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알고 있다. 머리는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이러한 예를 굳이 들어볼 필요도 없다. 이미 우리의 삶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것도 결국 그 목적은 머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정하도록 되어 있다.



내키지 않은 목적을 세우고 기피하지 않던 것들을 기피하는 의지의 힘으로 인생이라는 항해에 나선 사람은 훈풍이 불 때까지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보흐밀 흐라발은 성격이야말로 운명을 조각하는 끌이라고 했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해라는 것은 단지 사물의 작동 원리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 움직임의 기전이 마음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마음을 안다고 해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해는 사물과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 같지 않으면 이해라는 단계에 도달할 수가 없다.



사랑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되며, 그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국 그와 같은 마음이 되고자 하는 데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마음이 될 때 우리의 불안은 비로소 진정된다. 우리의 마음이 진정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을 사랑의 강력한 징후라고 했으며, 이를 두고 지적인 광기라고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같은 마음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음을 알고 있다고 해서 이해한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해는 수용이자 수긍이며 긍정이자 적극적 지지이다.



사회적 관계에 놓였을 때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자 관점을 수용한다.



그의 관점을 긍정하며 동의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를 이해하는 지경에 접근하게 된다.



그래서 오르테가는 "우리는 세계의 궁극적 존재가 물질이나 정신처럼 확정적인 어떤 사물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일 뿐이라는 확신을 언제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라고 탄식했었다.



작가가 수만 개의 단어를 씨실로, 그가 발견한 이야기를 날실로 엮어 하나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자신이 이해받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리가 없다.



작가는 글을 쓸 때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데에 필요한 것들로만 지면을 가득 채운다. 그가 걸어가는 길에 놓인 모든 사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선에 포착된 사물을 선별해 묘사한다.



즉 이 작업에는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다. 따라서 작가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할 첫 번째 자세는 바로 작가의 시선을 쫓아가려는 마음가짐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작가가 인도한 그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작가와 거리를 둔 채 등 뒤에서 그를 바라봐야만 한다. 그가 우리를 인도할 때에는 우리 발코 앞을 보기만 할 뿐이어서 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붙어 있던 시선에서 잠시 벗어나 그의 뒷모습을 통해 그의 시선이 멀리 던져졌을 때 어떤 그림을 그려내는지를 봐야만 한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걸어온 것을 그저 우리의 관점으로만 돌아보는 일이다. 작가가 우리와 같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작가의 마음속에 그려놓은 오솔길로 걸어가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홀로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집필하고 있었을 작가의 숨겨진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며, 그의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를 재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작품을 통해 드디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작가는 글을 통해 왜곡된 자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작가는 부끄러움이 많다.



작가가 설계한 세계 속에 갇혀 있으면 작가의 의도에 꼼짝없이 당하고 만다. 그래서 작가와 거리두기가 필요한 법이다.



이러한 시선으로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바라보게 되면 줄리언 반스가 왜 하필 1인칭 시점으로 회고록의 형식을 빌려 왔는지 알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이 회화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 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림을 보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에 캔버스 건너편에서 붓을 들고 있던 화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있다고. 그때야말로 그림을 이해하게 되고 더 나아가 예술가를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다고.



예술가가 지닌 마음의 시선이자 관점과 눈을 맞추는 일, 그것이 곧 예술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사랑을 이해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맞춘다.

매거진의 이전글 줄리안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찾아낸 철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