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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Sep 21. 2023

줄리안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찾아낸 철학

수제 감자튀김에 관한 철학적 담론


수제 감자튀김


토니와 식당 주인의 수제 감자튀김에 관한 에피소드는 줄리언 반스의 질문이 담겨 있다. Hand-made, 즉 수제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넘어선 철학적 담론이 숨겨져 있다.


그 얘기를 본격적으로 꺼내기 전에 우스갯소리를 먼저 꺼내보자.


십수 년 전에 돈가스 집에 들어갔는데 메뉴판에 "수제"라고 표기가 된 걸 발견했다. 그 말이 내게는 너무 생소했던 터라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수제? 그럼 발로 만드나?"라고 했더니 일행 중의 한 명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아니라 이 가게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얘기야."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도 없이 너무 명쾌했던 그의 보충 설명에 나는 특별한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마주 보며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뜻을 표시했을 뿐이었다.


내 기억 속에도 하나의 단편으로 잔재하고 있던 "수제"라는 거친 표현이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작품에서도 하나의 일화를 만들어내는 소용돌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러한 작은 일화에서 작가는 단상을 이끌어냈다.


이토록 단편적인 사건에서 단상을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작가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일이며, 작가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멘부커상을 받을 정도의 작가라면 이런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수제"라는 말은 공업화에 의해 탄생한 용어이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기 전까지 모든 생산 수단은 인간의 손에 의존했었다.


기계화 문명을 살아가는 현 인류가 식당에서 앉아 메뉴판에서 "수제"라는 말을 보게 된다면 과연 이 단어를 사전적인 의미에 국한해서 해석하게 될까? 아니면 식당의 주인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준비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을까?


작품에서 식당 주인에게 토니는 어차피 주인의 손으로 준비하는 음식이라면 얇게 썰어서 바삭하게 튀겨달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는 누군가의 손으로 썰어놓은 감자를 구입해서 자신은 튀기기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니든 식당 주인이든 상관없이 실제로 "수제"라는 사전적 의미에는 충실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대신에 단어가 갖는 맥락적 의미가 다르다.


토니는 주인의 손으로 직접 썰어 준비하는 감자튀김으로 이해했으며, 식당 주인은 구입한 식재료이긴 하지만 타인이 손으로 준비해 놓은 것이라는 가정을 두고 말했다.


인간은 사물을 관념으로써 소유한다. 다시 말해 사물을 설명하는 것이 관념이며, 이러한 관념이 보편성을 얻게 되면 하나의 개념이자 이론이 된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말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건 단지 이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단어에 대해서 공통적인 개념을 갖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비록 그 의미가 정확하게 중첩되지 않을지 몰라도.


그런데 토니와 식당 주인 간의 대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수제"라는 언어에 대해서 서로 간의 개념이 간극을 보여주고 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서로 대화는 하고 있지만 소통은 맥락이라는 요소에 의해 출구 없이 막혀 버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개념이 틀리지 않다. 다만 서로의 개념이 중첩되는 영역이 사전적 의미에 불과할 뿐이며, 맥락이라는 요소가 개입됨으로써 그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 지점에서 철학이 개입하게 된다. 니체가 신을 죽였고, 샤르트르는 본질이라는 가치 위에 실존을 올려 세웠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다양성이 기본적 덕목으로 급부상하게 되는데, 가치라든가 관점의 다양성이 인류의 문화적 양식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데에 기여했다. 문학에서는 고전주의가 낭만주의라는 물결에 의해 저만치 물러났으며, 과학에서는 고전물리학이 양자물리학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인간의 정신적 삶에 관해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발견했고, 종의 기원에서 생리학은 현생 생물들이 하나의 동일한 조상에서 진화되어 내려온 것이라는 점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토록 다양한 발견은 인간 삶의 양식을 매우 다채롭게 재구성했다.


다만 다양성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 우려스러운 부분도 상존한다. 다양성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절대적 가치가 지배했던 과거의 전통에서 멀어지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여러 가지 부작용에 대한 대비가 없다는 점이 문제로 떠오른다.



관점이 다양해지는 것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 사이에서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냐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과학의 경우, 뉴턴의 절대적 시간과 공간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무너졌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다른 물리력을 통합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양자물리학의 만만치 않은 반격을 받고 수세에 몰리기도 했다. 이에 더해 양자물리학은 스스로 이론적 한계점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철학으로 급격히 회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가치사슬 안에서 우선순위라는 문제가 대두되기도 한다. 다만 여기에 절대적 가치가 개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시대적 사상이 감독관처럼 눈에 불을 켜고 있다.


그래서 다시금 인류라는 배의 방향타는 철학의 손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철학 스스로에게도 질문만 남아 있다는 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 보자면 토니와 식당 주인은 서로가 배치되지만 옳고 그름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서로가 모두 옳다.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최단 경로로 움직임으로써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줄리언 반스는 일부러 이런 일화를 소설의 말미에 끼워 놓았다. 그렇다면 반드시 작가에게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합의되지  못할지라도 다양한 관점을 추구할 것이냐, 아니면 절대적 가치를 지향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고수할 것이냐의 기로에 우리를 세워놓은 셈이다.


비록 비전문가적 관점에 불과하지만, 나는 열역학 제2법칙을 준용함으로써 이 질문에 관해 내 나름대로의 답을 찾고자 한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에 관한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이 이론으로써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가역성"을 상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가역성을 갖는 물리법칙은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컵에 담긴 물을 흘렸을 때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다시 컵에 물이 담기게 되는 물리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들은 가역성이라는 이상적 가치를 버리지 않고 있다.


난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비록 몽상가라고 불릴지 몰라도, 나는 믿는다.


마치 순수예술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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