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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Sep 17. 2023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역사는 개인의 역사를 고려해야만 한다.



역사는 개인의 역사를 고려해야만 한다.

개인의 역사를 고려하기 위해선 개인의 속성을 개인 그 자체로만 아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한 우리의 시도는 잘해 봐야 반쪽짜리 성공에 불과하다.

줄리언 반스의 "The sense of an Ending"은 내게 특별한 기억이 있던 작품이었다. 6년 전쯤 첫 50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이 작품을 읽기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만큼 내게는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착안했던 명제가 불편했던 이유가 가장 컸다. 기억이 왜곡된다는 건 실제로 틀린 명제다.

정확히 말한다면 어설픈 기억이 왜곡된다고 말해야만 한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억을 하는 기술을 연설가들 사이에서 비밀스럽게 공유하곤 했는데 그 소중한 자료가 유실되는 바람에 현대에는 그 비밀의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다.

심지어 영국드라마 "셜록"에서는 시즌 3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 "기억의 궁전"이라는 명시적인 제목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의 비기를 소재로 재미있는 단만극을 우리에게 선사하기도 했다.

그 비밀스러운 기술을 터득하면 누구나 1년 안에 기억력에 관해 천재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해낼 수 있다. 그와 같은 기술을 맛보기로 체험한 바로는 굉장히 강력한 비법이었다.

그런 훈련을 통해 나조차도 2시간 만에 매우 생소하고 사소한 일들이나 단어까지도 아주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런 내게 기억이 왜곡된다는 단안으로 써 내려간 작품이 과연 얼마나 시간적 효용가치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기억술과 관련된 일련의 현대 뇌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무참히 깨부술 수 있는 그 비밀의 단 1%만 전수받은 경험은 줄리언 반스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그러나 당시 맨부커상을 둘러싼 어수선했던 소란이라는 배경을 잠자코 고려해 보니 줄리언 반스의 작품이 당시의 논란을 잠재울 만한 꽤 괜찮은 작품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나 독서토론의 주제도서로 선정된 만큼 이 기회를 빌어 줄리언 반스라는 큰 산맥 중 하나의 작은 산을 넘어볼 참이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탐독했다.

6년 전에 작가의 생각에 전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애독자를 자처하며 책을 펼쳤다. 6년이란 세월이 흐른 만큼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는 일이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난 늘 배움에 목이 마른 어린이니깐.

그리고 서평 혹은 후기는 늘 책과 어느 정도 시간적 거리를 둔 다음에 쓰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만 나의 작은 머리가 작품에 젖어든 다음 뇌리에 남겨진 훌륭한 몇 가지의 이야기들을 정리할 수 있다.

정신의 체로 걸러낸 줄리언 반스의 "The sense of an Ending"에서 가장 강력하게 남은 인상은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서사 구조였다. 이 작품은 사소한 것에 빠져들면 작품을 착안했던 명제라는 대로에서 벗어나게 된다.

19세기를 체로 걸러내면 소설이 남듯이 줄리언 반스의 "The sense of an Ending"을 체로 걸러내면 단 한 문장이 남는다.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를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그것이 역사라고 했다. 에이드리언에게 보냈던 편지에 대한 토니의 부정확한 기억, 단 한 쪽짜리 사본만 전해진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진 토니의 죄책감이 바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토니는 이미 비극의 원인과 결말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회고록을 쓰듯이 글을 썼다는 점이다. 바로 이 서사구조 때문에 이 책은 150페이지짜리 책이 아니라 300페이지짜리 책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놀라운 반전이 마지막 페이지에서야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판으로 247페이지까지 다다를 때까지 일언반구 진실에 대한 말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부정확한 기억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한 토니의 진술이 과연 신빙성이 있냐는 점이 바로 역사학자들이 생산해 낸 역사서에 대한 줄리언 반스의 통렬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을 역사학자들이 읽게 된다면 얼굴이 빨개지면서 자신이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는 느낌마저 들게 될 정도이다.

이 작품은 토니가 진술한 사소한 장면이나 인상에 초점을 두게 되면 줄리언 반스가 공략한 인간의 취약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라 포드 부인의 성적 취향이라든가 포드씨 가정의 묘한 분위기에 대한 각자의 경험에 따른 추정은 말 그대로 라운딩을 돌다가 벙커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뒤에 기억이 왜곡된다는 명제로 이 작품의 비평을 대신한 평론가들도 서사구조는 외면한 채 명멸했던 작중 인물들을 이해하 위해 분석하느라 초점을 엉뚱하게 맞췄기 때문에 나온 글에 불과하다.

오르테가는 비평가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명확한 말로 주문했다. 평론가는 작품과 독자를 가깝게 연결시켜줘야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할은 문화부 장관의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 훌륭한 작품이 독자들의 내면에 진한 색깔로 향기로운 멜로디로 물들 수 있는 안내자의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이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역사학자들이 부정확한 기억도 지니지 못한 과거의 사실에 대해서 불충분한 문서에 의존한 채 역사가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며 진화해 나가는 동인을 찾아내는 발굴 작업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의 역사를 무시하는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사람들의 선호가 빚어낸 행위들이 겨울바다의 성난 파도처럼 앞물결이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일어난 포말이 뒷물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역사에서는 흔적이 희미한 것들 투성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 사이사이 시간은 용해제로 존재하며, 이때 중재자로 나선 사람들이 역사학자뿐이다. 특히나 역사에서는 사료나 사건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료와 사건 등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역사적 진화가 바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진실이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막다른 골목길에 이르게 된다.

매몰된 뼈를 발굴한 고고학자나 진화론학자가 생경한 뼈의 구조를 보고 경악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역사학자들은 "운"이라는 요소의 개입을 역동적인 역사의 동인으로 내세울 수도 없다. 모든 게 우연적인 사건의 연속이었다는 논문을 상아탑 안에 거주하는 그 누가 환영하겠는가.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과거를 해석해야 하며 그 해석이 논리적 흐름을 유지한 채 현재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역사가 개인의 역사들의 총체라고 볼 때 개인사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줄리언 반스는 이 지점에서 비수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사의 주인공인 주체조차도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한 채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수준에 불과하며, 역사가들이 이런 개인사에 의지하면 할수록 역사가들의 작업은 역사라는 함수의 실제와의 이각이 더 커져갈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토니의 회고를 검토하면 나는 토니의 진술에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발견했으며 이에 따라 토니가 묘사한 포드 가족에 대한 인상에 특별한 의미를 찾거나 부여할 수도 없었다.

그는 청소년기 특유의 반사회적 시선으로 세부적으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던 역사시간에서의 토론 장면에 반하여, 자신을 환대하지 않았다고 회상한 베로니카 집에 머무른 그 일주일에 대한 묘사는 자세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았다.

특히 토니는 이미 에이드리언의 아들의 생모가 누구인지 알고서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비극이 휩쓸어간 포드 가족사에 대해 자신은 그 어떤 책임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패륜적 사건에 대한 책임을 사라 포드 여사로 몰아가는 듯한 묘사를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반감을 사게 되었다.

더군다나 학창 시절 에이드리언의 빛나는 지성을 흠모한 나머지 에이드리언이라는 한 인간을 미화시킨 토니의 관점은 감옥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반인륜적 사건의 비극적 결말의 원인을 한쪽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토니는 소심하고 용기가 부족한 성정이라 대놓고 사라 포드 여사를 비난하지 못했지만, 증거로 제시할 수도 없는 포드 부인의 편지를 언급하는 비겁함을 보여줬다.

마지막 페이지에 기술된 반전에서 멈춰 있지 않고 곧바로 첫 페이지로 다시 돌아오면 우리는 토니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그래서 두 번째 읽게 되면 이미 사건의 사실적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는 토니의 회고록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검토할 수 있는 동등한 위치에 올라선다는 뜻이다.

처음 읽을 땐 몰랐던 결과를 알고 다시 읽게 되면 회고록을 쓰고 있는 토니의 입장과 같아진다. 그런 시선으로 다시 읽어 보니 토니가 강조했던 자기 생존본능에 따라 변명과 변호로 점철된 그의 비겁함이 돋보였다.

전혀 객관적이지 않았던 그의 태도에 휩쓸린 나머지 어떤 이는 포드 가족에게서 근친상간의 의혹을 감추지 않기도 했다. 근자의 이런 의혹은 상당한 비약이 있다는 것을 논외로 하더라도 텍스트에는 그 어떤 단서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인륜적 행위를 의심한다는 발언은 상당한 수위를 보여줬다.


로고스가 말이자 생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말에는 생각이 담겨 있다. 즉 말에는 정신이 반영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정신은 수많은 관념의 집합체로서 그 사람의 내면을 인도하는 조타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발언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람만의 관념, 다시 말해 인간, 윤리 그리고 세계에 대한 믿음에 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토론 시간에 사라 포드 여사에게서 받았다던 편지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토니의 궁색한 세계관이 반영된 모든 진술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관점이자 태도는 발제문이 우리로 하여금 답변하도록 유도한 이야기들을 전개해 나가는 데에 방해물이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말을 아끼고자 했으며 그러한 자제력이 내가 계획했던 만큼 발휘되지 못했던 어제의 토론을 두고 내내 후회하고 있다.

다음 토론에서는 이러한 침묵의 미덕을 조금 더 보완함으로써 경청의 자세를 갈고닦을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한가한 휴일의 오후를 만끽하기로 했다.

그러한들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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