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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Sep 13. 2023

피츠제럴드 "부잣집 아이" #2

구조에 관하여





사물은 언제나 관계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관계에 의해 설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물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산속에 있는 나무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도 그 나무에 관해서만 말할 수 없다. 시를 쓰지 않는 이상 나무에 관해서 말할 때 서식환경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산이라는 서식환경을 제외하고선 우리가 그 나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우주로 눈을 돌려봐도 관계에 의해 정립되는 사물의 의미는 변함이 없다. 만약 지구가 없다면 태양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태양계도 관계로 구축된다.

이러한 사물과 사물 간의 관계에는 일련의 질서가 부여되기 마련이다.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이러한 질서가 곧 구조이다. 비록 이러한 구조가 비가시적일지라도 구조는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를 무시하고 사물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면 기껏해야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만다. 우리의 삶을 채우는 내용은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촘촘한 그물처럼 우리를 포획하고 있는 관계 안에서 움직이고 활동하는 모든 행위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없다면 태양의 존재도 없다는 말은 얼핏 보기에 모순적이다. 비록 미약하고 불완전한 지적 존재일지 몰라도 지구인들이 태양을 태양으로서 이해하고 그 존재를 인식하고 있음으로써 해서 태양은 언제나 태양으로써의 존재가 굳건해진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큰 나무가 쓰러진다 한들 쓰러진 나무의 잔재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만의 특정한 존재양식은 구조에서 탈피된 상태로 설명될 수 없게 된다.

쓰러진 나무의 잔재일지라도 그 잔재가 알려지기 위해선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쓰러진 나무와 그 사실을 발견한 나그네가 존재한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의 사건이며 하나의 증명인 셈이다. 다시 말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오르테가의 말처럼 나는 나와 세계로 구성된다. 나는 세계를 떠나 존재할 수 없으며 내가 없는 세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나 자란 환경이 나의 성격을 형성하기도 하며, 자신만의 호오가 성격의 골격을 이루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환경에서 동일한 경험을 하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에 동일한 성격을 지닌 사람을 만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괴짜에 가까우며, 동일한 것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유형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통념처럼 여겨지는 어떤 성격유형도 결국 타인을 쉽게 이해하고자 하는 성급함이 자아낸 조잡한 도구에 지나지 않다.

따라서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실제로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치 그를 낯선 우주에서 날아온 외계인을 바라보듯이 해야만 한다.

만일 조금이라도 자신의 경험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를 들여다보려고 한다면 피츠제럴드의 말처럼 허황된 영화 한 편을 보는 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인간적"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인간적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인간적이라는 형용사라는 형용사가 어울릴 만한 성격의 속성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인간적인 것의 속성에 관해 고민해 보면 막상 생각나는 것들이 많지는 않다. 인간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말문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 누구에게 인간적이라고 말하는지를 살펴보면 인간성에 관해 윤곽을 잡을 수 있다. 언제나 냉정하고 이성적인 면모를 보여줬던 사람이 어떤 순간에 나와 비슷한 모습이라든가 감수성 또는 반응을 보일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인간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즉 인간적이라는 말은 나와 닮은 성격이라든가 감성을 상대방이 보여줄 때 쓴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와 닮거나 비슷하다는 건 무엇인가?

그건 바로 내가 느꼈던 감정, 다시 말해 내가 경험해 본 것이다. 따라서 인간적이라는 말은 내가 경험해 본 것을 타인에게서 발견할 때 사용하게 된다.

타인과 나의 공통분모를 인간적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적이라는 속성이다.

하지만 피츠제럴드의 "부잣집 아이"를 읽고 우리는 인간적이다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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